한때 마약과 테러가 난무하던 무법 천지
그가 작품 기증해 ‘보테로 박물관’ 문 연후
지금은 문화·관광도시로 변신 성공 #1 콜롬비아 제2의 도시인 메데인은 꽃과 미인이 많은 패션 도시로 유명하다. 요즘엔 세계적인 작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도시로도 명성을 얻고 있다. 안티오키아 미술관(보테로 뮤지엄)과 그 앞의 보테로 광장엔 보테로의 작품들이 즐비하다. 관광객들이 보테로의 작품을 보기 위해 많이 찾는 명소가 됐다. 한 예술가가 한 도시의 문화 아이콘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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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보테르(1932~), 콜롬비아 출신으로 터질 듯 볼륨감 있는 작품으로 세계적 사랑을 받는 라틴의 대표적 작가 |
적도 지역이지만 1500m 고원에 위치한 메데인은 늘 봄날씨 같다. 상춘의 도시답게 꽃이 많아서인지 여인들마저 아름다워 패션과 디자인 산업이 발전했다. 길거리를 거닐다 보면 보고타 여인들보다 메데인 여인들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들이 모델 같은 메데인 여인들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린 이유다. 미인의 도시답게 중심가 거리(비아 데 콜롬비아)엔 콜롬비아 젊은 패션디자인너들이 만든 의상이나 액서사리를 파는 상점들이 화려하다. 파리의 패션 거리를 걷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가이드를 자청한 콜롬비아TV 여기자의 세련미에서도 패션산업의 수준이 가늠됐다. 뛰어난 미모를 지닌 그는 예전부터 알고 지낸 콜롬비아의 젊은 조각가 구스타보의 결혼 상대자다. 현재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작업 중인 남자친구를 대신해 그가 우리 일행을 안내하게 된 것이다. 콜롬비아에서도 메데인 사람이 가장 친절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는 격의감을 없애기 위해 오래 사귀어온 남자친구를 차버린 얘기까지 서슴없이 털어 놓았다. 바쁜 일정 중에도 짬을 내 그가 안내한 곳은 안티오키아 미술관이다. 보테로의 작품을 포함해서 보테로가 기증한 세계 저명작가 작품들이 소장된 미술관이다. 보테로는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세계 저명 작가들의 작품을 사들였다. 특히 칠레의 로베르토 마타, 쿠바의 윌프레도 람 등 라틴아메리카의 대가들을 비롯해 파블로 피카소, 안토니 타피에스, 바르셀로, 마놀로 발데, 마티스, 아르망, 스텔라, 로젠베르그, 막스 에르스트 등의 작품을 구입해 미술관에 넘겼다. 성공한 작가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1935년생인 보테로는 지금 프랑스 파리 작업실에 머물고 있다. 이탈리아와 미국에도 스튜디오가 있어 계절별로 옯겨 다니며 작업을 한다. 미술관엔 교통사고로 숨진 두번째 부인 세실리아 사이에 난 아들을 추억하는 작품도 걸려 있다. 보고타 보테로 미술관 관장을 지낸 첫 번째 부인 글로리아 사이에는 3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이 현재 콜롬비아 국방장관이다. 세 번째 부인은 그리스 출신의 여류 조각가인 소피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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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를 차용한 작품(왼쪽)과 전통 가족의 모습을 모티브로 한 작품 |
보테로는 1956년 멕시코에서 자신만의 양식을 자각하고 만돌린 그림을 통해서 양감을 부각시켰다. 이른바 ‘뚱뚱보’ 작품이 탄생된 순간이다. 피카소는 파리에 와 있던 멕시코의 디에고 리베라와 타마요, 그리고 쿠바의 윌프레도 람에게 “왜 너희들은 유럽 그림들을 그리고 있느냐, 너희들의 풍요로운 라틴 그림을 그려라”라고 충고한 바 있다. 보테로가 멕시코에 갔을 때 타마요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피카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보테로는 이때부터 벨라스케스, 고야 등 유럽 작가들을 모방하는 것에서 벗어나 고향인 메데인 풍경, 어릴 때의 추억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풍경에 유럽인들은 환상적이라며 열광했다. 사실에서 벗어나 더 부풀린 듯한 보테로의 형상들을 보고 매직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가르시아 마르카스(콜롬비아)나 바르가스 요사(페루)의 소설처럼 사실적 신비주의(매직 리얼리즘)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했다.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조각을 시작한 보테로는 만돌린 등을 조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리석을 이용하거나 에폭시 재료로도 작품을 했다. 터질 듯 한 절대적 볼륨에 대한 보테로의 표현욕구와 철학은 조각으로 귀결됐다. 미술관 드로잉실엔 수채화와 더불어 연필, 석탄을 이용한 드로잉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양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가 고민한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투우 장면을 그린 작품도 많다. 보테로는 4살 때 부친을 잃는다. 말에서 떨어진 낙마 사고였다. 보테로가 13살 때 삼촌은 그에게 살기 위해선 투우를 배워야 한다고 권했다. 투우사 양성학교에 들어갔지만 끝내 그림을 포기하지 못했다.
#2 미술관을 나와 산 안토니오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테로의 그 유명한 평화의 새 조각을 보기 위해서다. 그가 기증한 조각 작품에 폭탄이 설치돼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폭탄 파편으로 갈기갈기 찢긴 작품의 잔해물은 여전히 현장을 지키고 있다. 그 옆엔 보테로가 똑같이 다시 만든 작품이 설치돼 있다. 테러, 폭력에 대한 아픔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다. 테러와 마약으로 망가져 가는 콜롬비아를 추스르기 위해 보테로는 ‘폭력’을 주제로 작품을 끊임없이 해 왔다.
메데인 중심가는 폭력과 가난으로 얼룩졌었다. 15년 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메데인’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관광도시로 입지를 굳히기 위해 공원을 만들고, 꽃을 심고, 보테로로부터 작품을 기증받아 문화도시 이미지를 구축해 가고 있다.
마약 마피아단이 학교까지 테러 대상으로 삼았던 예전과는 비교가 된다. 사실 산 안토니오 공원은 메데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모여 들어 휴식을 취하는 곳인데, 1995년 폭탄테로로 45명이 희생됐다. 당시 메데인 시장 자택에도 폭탄테러가 감행됐다. 슈퍼마켙 봉투 속에 다이나마이트를 넣어 야자나무 밑에 넣어 두는 수법까지 썼다. 보테로 아들도 납치돼 몸값을 요구받기도 했던 것이 콜롬비아의 사회였다.
한때 콜롬비아는 농민의 생존법으로 불법 마약 재배가 조장됐다. 유카, 감자 등을 키우지 말고 대신 마약을 키우면 돈을 많이 주겠다는 제안에 농민들을 응할 수밖에 없었다. 10년 전부터 새 정부가 마약 대신에 콩, 감자, 꽃, 유카 등을 심는 데 지원하는 사업을 펼치면서 마약 재배가 줄어들고 있다.
얼머 전까지만 해도 마약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었다. 마피아단은 항상 눈에 띄게 하고 다녔다. 고급 명차와 아름다운 여자가 늘 옆에 있었고, 검은 정장을 하고 다녀 누구나 알아보게 내보란 듯이 거리를 활보했다고 한다.
메데인은 이제 패션과 꽃, 문화 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콜롬비아의 유명한 수출품의 하나가 바로 꽃이다. 튤립뿐만 아니라 무궁화 종류의 다양한 꽃들이 미국과 유럽에 대거 수출되고 있다. 커피와 바나나도 브라질에 비해 질이 좋아 해외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치키타( 귀여운 소녀)’라는 상표의 바나나가 유명하다. 말을 타고 이동해야 할 정도로 산지 지형이 많은 메데인의 말은 족보가 좋은 경마로 정평이 나 있다. 산지 지형에서 달련돼 지구력에 속도까지 갖줬다. 보테로는 여기에 문화도시 이미지를 보태고 있다. 한 작가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를 메데인은 보여주고 있다.
몇 해 전 파리 작업실에서 보테로를 만난 적이 있다. 높은 천장엔 캔버스 천을 걸어 놓은 도르래가 설치돼 있었다. 이젤 없이 작업하는 그는 벽에 고정시킨 캔버스 천에 중심부터 주제를 그리고 부수적인 이미지를 그려 나갔다. 작품이 완성되면 그 부분만을 잘라내 캔버스 틀을 만들었다. 크기에 제한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작업하기 위한 나름의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 왜 뚱보를 그리느냐?’는 질문에 보테로는 “나는 뚱보를 그린 것이 아니야”라고 답했다. 절대 양감의 추구 바로 그것이었다.
메데인(콜롬비아)=편완식 선임기자
〈공동취재: 안진옥 중남미 미술전문가, 권순익 화가, 김영재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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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테로가 산 안토니오 공원에 기증한 ‘평화의 새’. 1995년 이 조각작품에 폭탄이 설치돼 45명이 숨졌다. 당시 갈기갈기 찢긴 작품의 잔해물은 여전히 현장을 지키고 있고, 그 옆엔 보테로가 똑같이 다시 만든 작품이 나란히 서 있다. |
투우 장면을 그린 작품도 많다. 보테로는 4살 때 부친을 잃는다. 말에서 떨어진 낙마 사고였다. 보테로가 13살 때 삼촌은 그에게 살기 위해선 투우를 배워야 한다고 권했다. 투우사 양성학교에 들어갔지만 끝내 그림을 포기하지 못했다.

메데인 중심가는 폭력과 가난으로 얼룩졌었다. 15년 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메데인’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관광도시로 입지를 굳히기 위해 공원을 만들고, 꽃을 심고, 보테로로부터 작품을 기증받아 문화도시 이미지를 구축해 가고 있다.
마약 마피아단이 학교까지 테러 대상으로 삼았던 예전과는 비교가 된다. 사실 산 안토니오 공원은 메데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모여 들어 휴식을 취하는 곳인데, 1995년 폭탄테로로 45명이 희생됐다. 당시 메데인 시장 자택에도 폭탄테러가 감행됐다. 슈퍼마켙 봉투 속에 다이나마이트를 넣어 야자나무 밑에 넣어 두는 수법까지 썼다. 보테로 아들도 납치돼 몸값을 요구받기도 했던 것이 콜롬비아의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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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녀가 보테로광장에 설치된 보테로 작품 ‘이브’ 앞에서 걸터 앉아 있다. 터질듯이 풍만한 ‘이브’는 햇살이 비추거나 빗방울이 미끄러져 나갈 때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
얼머 전까지만 해도 마약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었다. 마피아단은 항상 눈에 띄게 하고 다녔다. 고급 명차와 아름다운 여자가 늘 옆에 있었고, 검은 정장을 하고 다녀 누구나 알아보게 내보란 듯이 거리를 활보했다고 한다.
메데인은 이제 패션과 꽃, 문화 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콜롬비아의 유명한 수출품의 하나가 바로 꽃이다. 튤립뿐만 아니라 무궁화 종류의 다양한 꽃들이 미국과 유럽에 대거 수출되고 있다. 커피와 바나나도 브라질에 비해 질이 좋아 해외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치키타( 귀여운 소녀)’라는 상표의 바나나가 유명하다. 말을 타고 이동해야 할 정도로 산지 지형이 많은 메데인의 말은 족보가 좋은 경마로 정평이 나 있다. 산지 지형에서 달련돼 지구력에 속도까지 갖줬다. 보테로는 여기에 문화도시 이미지를 보태고 있다. 한 작가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를 메데인은 보여주고 있다.
몇 해 전 파리 작업실에서 보테로를 만난 적이 있다. 높은 천장엔 캔버스 천을 걸어 놓은 도르래가 설치돼 있었다. 이젤 없이 작업하는 그는 벽에 고정시킨 캔버스 천에 중심부터 주제를 그리고 부수적인 이미지를 그려 나갔다. 작품이 완성되면 그 부분만을 잘라내 캔버스 틀을 만들었다. 크기에 제한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작업하기 위한 나름의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 왜 뚱보를 그리느냐?’는 질문에 보테로는 “나는 뚱보를 그린 것이 아니야”라고 답했다. 절대 양감의 추구 바로 그것이었다.
메데인(콜롬비아)=편완식 선임기자
〈공동취재: 안진옥 중남미 미술전문가, 권순익 화가, 김영재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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