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애절하고 슬펐다. 차마 들어주지 않을 만큼 간절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진정 사람의 소리였다. 하지만 아무런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땅은 울리지도 않는데 땅 속에서 들려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는 트로이의 어린 왕자였던 폴리도로스가 떠올랐다.
프리아모스 트로이의 왕은 첫 번째 아내 아리스베와 이혼한 후 헤카베와 결혼하여 무려 열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폴리도로스가 막내이다. 그리스인들이 함대를 이끌고 트로이를 공격해 왔을 때 처음에는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헥토르가 적장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트로이 왕은 내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트로이가 그리스에 넘어가면 자식들 중 한 명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부는 막내 아들 폴리도로스를 트라키아의 비스톤인의 왕 폴리메스토르에게 부탁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막내에게 물려줄 몫을 챙겨서 그 왕에게 보냈다. 폴리메스토르에게 폴리도로스를 보내면서 트로이 왕은 많은 재보를 막내의 몫으로 보내며 그 수하에서 충직한 신하를 딸려 보냈던 것이다.
트로이 왕이 우려했던 대로 결국 트로이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제 어린 왕자는 돌아갈 곳도 없었다. 막상 친구이며 주군이기도 한 프리아모스가 트로이 멸망과 함께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폴리메스토르는 친구의 아들을 보호해주는 대신 오히려 욕심이 발동했다.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보에 욕심이 생긴 것이었다. 그 아이만 없으면 그 모든 재보는 자기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이 들자 그는 아이를 지키고 있던 트로이의 충신들을 한 사람씩 유인하여 살해하고 결국 아이 마저 죽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이 비밀로 언제까지나 남아 있지는 않았다. 아이의 유모는 가까스로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트로이는 이미 잿더미로 변해있었다. 그녀는 잿더미로 변한 트로이를 뒤로하고 돌아왔을 때 트라키아에서 가까운 트로이 접경에는 그리스로 귀환 중인 오디세우스 일행이 묶고 있었으며, 그 일행 중에는 트로이 고관대작의 부인들과 명망있는 트로이의 여인들이 포로로 동행하고 있었다. 그 포로들 중에는 트로이의 왕비 헤카베도 있었다. 그녀는 반가운 마음에 특별한 여인들이 묶고 있는 숙소로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리스군의 제지를 받고 그들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트로이의 왕비 헤카베의 시녀라고 밝히고 그녀를 만날 수 있기를 부탁했다. 그녀는 트라키아인들 몰래 왕비 헤카베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배려로 트로이의 명망있는 부인들과 함께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그녀는 헤카베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소상하게 알리며 통곡했다.
헤카베는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트라키아의 왕에 대한 배신감으로 이를 갈았다. 그녀는 막내아들의 유모를 따라 아들이 죽었다는 곳으로 갔다. 그녀의 말대로 어린 아들은 죽은 채로 해변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그를 얼싸안고 통곡하며 어떻게든 복수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녀는 서둘러 아이의 시체를 수습하여 유모와 함께 아이를 은밀한 곳을 택하여 묻어주고 트로이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 다음날 그리스의 총 사령관 아가멤논을 만나 부탁을 했다. 트라키아의 왕을 트로이로 부를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아가멤논의 하락을 받은 그녀는 트라키아의 왕 폴리메스토르에게 '막내아들을 맡아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잘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감춰둔 나라의 막대한 재보도 맡기려고 하니 왕의 아들들을 함께 데리고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 편지를 받은 트라키아 왕은 내심 기뻐하며 서둘러 트로이로 왔다.
트라키아 왕이 즐거운 표정으로 아들들을 앞세우고 그녀를 만나러 왔을 때, 이미 헤카베는 자기를 따르던 여인들을 무장시켜서 방에 숨겨두었었다. 그가 아들들과 들어왔을 때 헤카베의 여인들은 트라키아 왕을 결박하고, 그의 아들들을 한 사람씩 맡아서 목을 졸라 숨지게 하여 시체를 은닉했다. 헤카베에게 속았음을 알고 그는 발악했으나 그의 입은 이미 막혀있는 상태였고 꼼짝할 수 없었다. 그의 아들들을 처리한 헤카베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못된 놈, 그래도 트로이 왕의 절친한 친구요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 알고 막내를 맡겼거늘 재보에 탐이 나서 내 아들을 죽였더란 말이냐? 그라고도 살기를 바랐더냐? 네 아들들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을 이해하겠느냐? 내 기어코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비록 트로이가 망하여 네 눈에는 우리가 보기에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네 놈은 트로이를 지키는 신들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예리한 칼을 빼들고 그에게 다가섰다. 그는 떨면서 오줌을 찔끔거렸다. 입이 막혀서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몸짓으로 살려달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다가갔다. 그녀의 눈가에서 자비란 찾아볼 수 없었다. 원한이 불타는 그런 눈이었다. 그는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간 그녀의 손길이 움직였다. 그가 바둥겨렸다. 그녀의 손에는 그의 한쪽 눈알이 들려있었다. 그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다시 그녀의 손에 그의 다른 쪽 눈알이 들려졌다. 그는 장님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더는 세상을 볼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악을 쓰며 소리쳤다.
"이런 트로이의 개 같은 년. 저주 받아라. 네 년은 불타는 눈을 가진 암캐가 되어라! 으아아…"
헤카베, 그녀는 비운의 여인이자 비극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성격은 괄괄했고, 격렬했다. 그녀는 결국 트로이가 망하고 그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던 헬레네가 메넬라오스에게 이끌려 돌아오는 것을 보고 그녀를 통렬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저런 요사스러운 년. 내 아들을 죽게 만들고 내 나라를 망친 년. 저년을 어떻게 죽일꼬!"
그녀의 결렬한 비난을 옆에서 들은 메넬라오스는 "알겠소. 부인 내가 고국의 흙을 밟게 된다면 기필코 헬레네를 내 손으로 죽일 것이오."라고 맹세했다.
그녀의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리스군은 자신들의 위대한 장수 아킬레우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제의를 열고 그녀의 딸 폴릭세네를 제물로 바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또한 큰아들 헥토르의 아들, 그러니까 손자인 아스티아낙스의 장례식을 보아야만 했다. 이미 패전국의 왕비, 나라 잃은 왕의 왕비로 전락한 그녀는 미쳐가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난 다음, 그녀를 비롯한 트로이의 여인들을 호송하는 그리스 군은 트라키아를 지나게 되었는데, 트라키아 인들은 헤카베를 향해 돌을 던졌다. 그 돌에 맞은 헤카베는 그만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곳에 묻힌 그녀의 무덤은 키노스세마란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으니 '암캐의 무덤'이란 뜻이다.
트라키아, 지금 아이네이이스가 이른 곳은 바로 트라키아의 땅이었다. 아이네이아스와 동료들은 그곳이 이와 같은 범죄로 인해 저주받은 땅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급히 그곳을 떠났다. 그들의 지치고 힘든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나라 잃은 이들이 갈 곳은 특별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어디이든 자리를 잡고 도시를 세우면 되었다. 그렇게 방황하다가 그들이 이른 곳은 델로스 섬이었다. 이들은 델로스 섬에 상륙했다. 이 섬은 원래 바다 위로 떠다니는 섬이었다. 그런데 제우스가 이 섬을 견고한 쇠사슬로 해저에 묶어 놓았다. 그리하여 아폴론과 아르테미스가 이곳에서 태어나자, 그 때문이 이 섬은 아폴론에게 봉헌한 섬으로 이제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섬이 되었다.
아이네이아스는 마침 이곳에 있는 아폴론의 신전에서 신탁에 문의했지만, 그의 신탁이 늘 그렇듯이 "너희들의 옛날 어머니를 찾으라. 그곳에 아이네이아스 종족이 산다. 다른 모든 국민을 그들의 지배하에 놓을지어다."라는 애매한 내용의 신탁이었다.
다음 주에 계속
필자의 신간 <해설이 있는 어린왕자> 바로가기
% 필자의 블로그 바로가기 http://blog.daum.net/artofloving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