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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 드라마에 키스 신, 섹스 신은 필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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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9-16 09:38:32 수정 : 2010-09-16 09:3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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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편하게 쇼파에 누워 드라마를 감상한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아니다 싶으면 바로 채널을 돌린다. 즉, 유명 연예인이 나와 러브라인을 형성하는 드라마이거나 시청률을 올릴 수 있는 극성이 강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너무도 쉽게 버림을 받게 되는 게 드라마의 운명이다. 아니 시청자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지 않으면 처절한 외면을 받는게 드라마 작가의 운명이다.

나의 직업은 드라마 작가이다. 물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드라마 작가, 대필 작가이다. 나도 한때는 작품세계 운운하며 대대 손손 기억에 남을 명작 드라마를 쓰는 작가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그리 유명하지도 않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알아주는 방송국이 어디 있으며 하물며 시청자들이 있을리 만무하겠는가?

드라마는 한회에 다섯 번 웃기고 한 번은 울리든지, 아예 시청자들이 '막장 드라마'라며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드라마가 나오는 그 시간엔 텔레비젼 앞에 앉게 만드는 마력을 지녀야 한다. 시쳇말로 시청자들은 샤랄라 풍의 재벌가 2세 이야기 혹은 키스신 섹스신은 필수로 들어가 있는 멜로 드라마, 선악 대비가 강렬해 결말이 어떻게 될지 뻔하게 보이지만 비틀고 비틀면서 막장까지 가는 드라마를 원한다는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높은 승률을 유지하면서도 작품세계는 가지고 가는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고민에 글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안 친구가 나에게 연극 한편을 권했다. 바로 연극 [연애희곡]이다. 친구는 나에게 연극에 대한 간략한 정보만 알려줬다. 즉, 잘나가는 드라마 작가이자 주인공 타니야마(이지하 분)는, 슬럼프에 빠져 원고에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는 정보와 그 작가가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사랑 얘기를 쓰고 싶어 원고를 독촉하러 온 PD 무카이(도이성 분)에게 연애를 제안한다는 두가지 정보였다.

처음엔 나와 비슷하게 슬럼프를 겪고있는 드라마 작가가 어떻게 슬럼프를 극복하고 다시 글을 쓰게 되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한가지 더 호기심을 잡아끈 건 연극 속에 등장하는 작가의 도발적 제안이었다. 즉, 글을 쓰기 위해서 작가들이 필히 거치게 되는 사전 조사 작업(이건 취재기자 저리가라 할 정도로 몇날 며칠을 취재하러 돌아다니며 하루 정도 직접 경험해보기도 한다)이 아닌 실제로 연애를 한다니? 더 드라마틱 하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실제 연애의 경험이 없어도 드라마는 쓸 수 있다. 주인공 타니야마가 그러하다. 타니야마는 지금껏 시청률이 높은 멜로 드라마를 써오긴 했지만, 사실은 연애엔 젬병이다. 그녀는 지금  글 한 줄 한줄에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사랑 이야기가 녹아 들어가 있는 대작을 쓰고 싶다. 그래서 PD 무카이에게 연애를 걸게 된다.

 

 

연극 [연애희곡]은 현실과 허구, 허구 속의 허구를 교묘하게 섞어 놓았다. 작가 타니야마의 손에서 탄생하는 극본은 현실 장면이다. 그 극본 속 주인공인 가정주부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허구이다. 반면 그 가정주부가 쓴 PD 와 작가의 이야기는 허구 속의 허구라고 볼 수 있다. 뻔한 사랑 이야기를 식상하게 여기는 관객들의 입맛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연극은 현실의상황에 따라 반복되고 번복되는 이중플롯, 아니 3중플롯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여기에 갑자기 들이닥친 우체국 강도들은 타니야마가 유명한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들을 드라마 등장인물로 각색해달라는 무리한 요구까지 하게 된다.

극 속에선 대본이 놓인 응접실에 조명이 들어오면 대본 속 이야기가 살아움직인다는 설정을 해 놓았다. 세가지 이야기를 구분하기 위해 벽 색깔을 달리해 보여주기도 했다. 개인적으론 조명이 들어오면 활자화 되있던 대본이 드라마 속 장면으로 바로 전환 돼 살아움직이는 게 너무 신기했다. 게다가 현실과 허구, 허구 속의 허구가 교차되면서 극은 점점 변화무쌍한 생명력을 얻게 된다. 마치 내가 쓴 글의 방향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답답한 지점에 누군가의 조언에 아이디어를 얻어 극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방향점을 얻게 된 듯 했다.

 

방송은 작가 혼자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 제작자 연기자, 스태프와의 공동작업으로 완성된다. 작가가 아무리 치열하게 고민해 캐릭터 설정, 재미있는 상황과 개연성 있는 이야기 전개를 보여줘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이 장면에선 이렇게 반응을 해 줘야지 생각해서 신을 잡아놓으면 PD 나 연기자들 혹은 시청자들은 납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심한 경우엔 그들의 논리에 수긍이 되면 나 역시 장면을 수정하기도 하지만 전체 극을 흔들어 놓을만큼 큰 수정일때는 양보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초보 작가일 땐 드라마 방향 잡기에서 벌써 진이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연극 [연애희곡] 속에선 작가 혼자 극을 쓰는게 아닌 무카이, 강도 일당들이 등장해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들은 다분히 강제성이 농후한 '플레이! 플레이! 섹스!'를 연발하며 섹스 장면을 삽입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며 극적인 반전을 위해 강도와 작가가 사랑에 빠지는 신 역시 집어 넣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마치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시청자들의 눈길을 확 잡아끄는 '몸을 섞어보면 사랑이 보인다.' '도너츠랑 섹스 해 봤니?' 니가 하면 나도 한다.' 멘트 역시 간간히 등장해 어떻게 한 편의 막장 드라마가 탄생하는지도 엿볼 수 있다.

나중엔 이 모든 게 대작을 쓰기 위한 타니야마의 계획적인 의도임이 드러난다. [연애희곡]의 원래 의도는 사랑, 또는 일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고 했지만 나에겐 작가들이 에피소드를 얻기 위해 이렇게 색다른 방법도 쓸 수 있음을 알게 한 연극으로 기억될 듯 하다. 고여있던 머리에 새로운 아이디어의 물이 흐르는 느낌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다시 한올 한올 글을 살려내야 할 일만 남았다.

타니야마는 실제 현실에 돌아와서도 '사랑'을 하지 못한다. 그저 '사랑'을 쓸 뿐이다.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무카이의 말에서도 드라마에 쓸 마지막 대사를 찾아낸 타니야마의 모습이 그러했다. 이 장면에선 나 역시 그러한 실례가 있어 공감의 슬픈 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정다훈(otrcoolp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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