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폭했던 정치사와 비극적 요소가 뒤섞였던 까닭에 그간 연산군은 적잖이 조명되어왔다. 그런 가운데 이 책이 차별성을 갖는 지점은, 철저하게 사료를 바탕으로 그 시대의 내면을 세밀하게 살펴보며 구체적인 실상들을 낱낱이 밝혔다는 데 있다. 연산군은 극도의 혼란스러운 정치를 펼치다 반정으로 12년 만에 치세를 종결 당했고,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과정이 격동적이며 이례적이었던 만큼 그것을 복원하고 분석하는 데는 더욱 침착한 시각과 서술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연산군은 즉위 직후부터 패륜을 저질렀다. 가령 성종의 초빈(初殯) 때부터 부왕이 기르던 사슴을 쏘아 죽여 구워먹고 부왕의 영정을 걷어 손으로 때렸으며, 나중에는 그것을 표적으로 삼아 활을 쏘기도 했다. 성종이 세운 옛 법률을 모두 폐지하고 성종을 위해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을 처벌했으며, 부왕의 기일에 사냥을 하거나 선릉(宣陵)에서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심지어 대취하자 선릉을 파오라는 지시까지 했다.
책은 성종이 남긴 정치적 유산으로서, 훈구대신들을 제어하고 견제하는 세력으로 키웠던 삼사의 기능과 역할을 짚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성종은 25년의 치세 중 물리적 억압이나 숙청을 행하지 않고 유교정치의 기반을 마련한 성군으로 평가되었다. 그런 그가 역설적이게도 왕비의 폐출과 사사를 집행했는데, 이것은 연산군의 정치가 거대한 폭정으로 귀결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저자는 연산군의 어린 시절부터 짚어나간다. 세자 때 그의 학습능력은 다른 왕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가 당시 학문적 본류인 경·사보다는 여기(餘技)로 취급되던 문학에 더 큰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는 점이다. 즉, 연산군은 이성보다 감성이 풍부했고, 어쩌면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일 수 있는 이해력과 관련해서는 실록 도처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발견된다. 핵심적인 문제점은 문리(文理)의 불통이었다. “올해에 벌써 17세인데도 아직 문리를 해득하지 못하셨습니다”라는 우승지 권경희의 지적 등 다양한 근거를 통해 저자는 연산군이 역사적 문제의 인과관계나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주장한다. 사안을 혼동하고 우선순위를 뒤바꾸는 그의 판단 착오가 세자 시절의 학습에서 단초를 보인다.
책은 이어 연산군 시대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등의 양상을 포괄한 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실체에도 접근해간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조선왕조는 연산군 시기의 가혹한 시련을 극복하면서 삼사의 기능과 정치적 정립 구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었고, 이제 조선에서 어떤 의미 있는 정치적 변화는 그런 구조를 유지한 상태에서만 이뤄질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후 여러 변화와 발전이 형성되는 중앙 정치의 운영 원리가 현실에 더욱 견고하게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이 시기의 시련과 극복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1만8000원.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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