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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무맥] (33) 한국 武의 상징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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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7-06 01:53:52 수정 : 2010-07-06 01:5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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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투혼 불태운 호국성지…국기 십팔기 부활하다
남한산성하면 으레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 꿇은 인조(仁祖)의 삼전도(三田渡) 굴욕을 떠올리고, 역사적 치욕의 장소로 생각한다. 그리고 조선의 반정(反正) 가운데 역사를 거꾸로 돌린 인조반정을 생각하게 된다. 인조반정은 역사를 노론 중심의 수구세력 손아귀로 돌아가게 하고 끝내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판도의 변화와 새로운 세계 문명에 적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치유되기 시작한 것은 정조(正祖)에 이르러서였으니 이미 상당한 기회 상실을 겪은 뒤였다. 그러나 남한산성이 그처럼 역사의 치욕만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서로 다른 역사의 층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상징적인 산성이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부터 한강을 지배하는 것이 삼국의 패권에 다가가는 길이었고, 그것은 바로 남한산성 지역을 지배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신라 진흥왕은 남한산성을 손아귀에 넣고부터 한강을 지배, 중국과의 교류를 원활히 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세력 팽창을 가속화하여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아픔을 간직한 치욕의 산성일 뿐 아니라 한반도의 배꼽으로 이곳을 차지하는 나라가 패권을 차지한 한국 무맥의 상징이다.
신라는 통일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 국토의 전역에서 대당 투쟁 전쟁을 오랫동안 수행했는데 이때도 남한산성은 그 요충지로 떠오른다. 남한산성의 전방기지로서의 역할,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통일의 완성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신라는 달아나는 당나라 군대를 한강을 타고 신속하게 뒤따라가, 한강 하류 파주 감악산 등지에서 승패를 가름하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당나라가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압록강 이북, 즉 요녕성으로 철수하게 된 것도 바로 이곳에서 입은 치명적인 전력 손실 때문이었다고 역사가는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남한산성이야말로 한반도 전쟁에서의 승패를 가르는 지역이었음에 틀림없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다가 스스로 항복하게 된 것도 강화도의 강도(江都)가 청나라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뒤 남한산성을 지탱할 능력이 더는 없다는 종합적 판단에서였다. 역사는 실은 척화파(斥和派)냐, 주화파(主和派)냐의 문제가 아니고 무력과 국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양파의 논쟁은 이미 승패가 결정 난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서의 공리공론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는 전쟁에서 명분과 이데올로기는 헌신짝과 같은 것이다. 도덕과 명분을 위해서 전쟁에서 스스로 질 수는 없는 것이 인류사의 전쟁이라는 것의 정체이다. 역사가 개인의 선악 문제가 아닌 이상,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생존 후의 문제이지 생존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 땅에는 한시도 무예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 민족은 사대주의와 이상한 문화논리에 의해서 마치 무예라는 것이 선택의 무엇인 양 착각을 하고, 심지어 무예 자체를 평화를 가로막는 것으로 여겨 천시하는 패배자의 논리에 길들여져 왔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에 산재한 성은 여러 종류와 대소로 1700여개나 된다. 이 중 산성의 모습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남한산성이 유일하다. 남한산성은 전체 길이가 12㎞ 정도이며 인체에 비유하면 한반도의 배꼽에 해당하는 아주 귀중한 곳이다. 성의 주변부가 험준해 수비하기가 좋고, 중심부는 평지로 되어 있어 주거하기에도 쉬워 산성으로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

남한산성은 백제 한성시대 산성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지척에 있는 산성이기도 하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병을 막기 위해 쌓은 석축성이 지금도 남아 있다. 산성은 ‘낮이 길다’하여 일장성 또는 주장성으로 불렀다. 고려는 남한산성에서 몽골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십팔기 보존회 회원들의 시연을 관람하고 있는 남한산성 등산객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이어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서산대사도 와서 보고 사명대사도 잠시 성의 보수를 지휘한 적이 있다. 광해 13년에는 경도(제2의 왕도) 보장지로 지정하고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을 개축하기 시작하였다.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인조마저도 1624년 7월에 총책임자 완풍부원군 이서 장군에게 명하여 동남성은 이회, 서북성은 벽암각성대사를 책임자로 하여 2년5개월에 걸쳐 완성시켰다.

조선시대 국가의 위기 때는 종묘사직을 남한산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산성 중에 ‘종묘사직의 성’인 셈이다. 유사시 남한산성은 국가의 중요한 전략 요충지이며, 평소에는 임금이 더운 여름날 피서를 오던 곳이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성문과 수어장대·행궁이 있었으며, 성을 쌓기 위해 모여든 팔도의 승병이 머물렀던 8개의 사찰과 승병의 사령부에 해당하는 장경사가 있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이곳으로 와서 45일간 피난생활을 했다. 강화가 함락되는 바람에 인질이 되어 삼전도로 끌려왔다. 인조는 먹을 것 입을 것이 없는 상황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서문을 통해 삼전도로 나가 항복을 했던 것이다.

1907년 을사늑약으로 조선군이 무장해제되자 팔도의 의병들이 이곳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산성에는 약 300명의 승군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일본군들이 몰려와 승병과 의병들을 참살하였다. 그 바람에 장경사 하나만 남기고 무기와 화약을 보관하고 있던 모든 절들은 폭파당하게 된다. 따라서 이곳은 호국불교의 성지이다. 남한산성은 또 중국의 간섭을 받던 조선이 예비군을 숨겨놓은 곳이기도 하다. ‘어중이떠중이’라는 말은 산성 일대에서 무예를 수련하고 숙식을 해결하는 상당수의 승려가 실은 조정에서 유사시를 대비해서 암암리에 양성한 ‘어(御)중이’거나 떠돌아다니는 ‘떠중이’라는 말에서 비롯됐다. 말하자면 오늘날 예비군과 같은 것이 이곳에서 길러졌다. 그런가 하면 구한말 박해받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목을 베인 순교지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다원 다층적인 역사의 현장이다. 국기인 십팔기 역사도 남한산성과 무관하지 않다. 십팔기의 역사는 임진왜란·병자호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무비를 소홀했던 조선 왕조는 임란을 당하고서야 병장무예체계를 다듬는데, 전란 중에 명군으로부터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구해보고 그 기예를 받아들인다. 전란 후 이를 바탕으로 ‘무예제보(武藝諸譜)’라는 최초의 무예서를 편찬하게 된다. 여기에는 왜구를 상대하기에 효율적인 장창, 당파, 낭선, 쌍수도, 등패, 곤봉의 6가지 무예가 실려 있다.

그 후 광해군에 이르러 후금이 대두하자 다시 무예를 정비하게 되는데, 이때 ‘무예제보번역속집’을 펴내어 권법, 월도, 협도곤, 왜검을 정리하였다. 임란 때 일본의 보병을 상대하던 6기로는 북방의 기마병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긴 병장기인 월도와 협도곤을 서둘러 정비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역행한 조선은 인조반정으로 인해 청나라의 의심을 사게 되고, 역공에 해당하는 병자호란을 맞게 되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고 만다.

조선은 효종, 숙종을 거치면서 꾸준히 무예체계를 다듬어 나가는데 영조 때 사도세자가 섭정할 때 기창, 본국검, 제독검, 편곤 등의 기예가 추가되어 18가지의 무예와 응용종목인 마상4기가 완성된다. 여기서부터 ‘십팔기(十八技)’라는 우리 무예의 명칭이 시작되었다. 이때 편찬된 ‘무예신보(武藝新譜)’는 멸실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다행히 그의 아들 정조가 십팔기 교본으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펴내 십팔기를 영구히 전하게 하였다. 이후 조선의 모든 병사들은 이 십팔기로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당연히 십팔기는 무과의 시취과목이 되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에서 수어청 병사들의 십팔기 시연을 벌이고 있는 십팔기 보존회 회원들.
일부 학자들은 병자호란은 청 태종이 군사를 이끌고 한양을 비롯하여 조선반도 깊숙이 들어왔지만 생사를 겨룬 전쟁의 흔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단지 청나라가 명을 치기 위해서 후방 세력인 조선을 닦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북방세력들은 오랑캐라고 대하는 고려나 조선과 달리 한민족을 그렇게 적대시하지는 않았다는 설도 대두되고 있다. 한반도에 들어온 한민족은 그 후 농업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문화적으로 급속하게 중국화되고 사대하게 되었지만 핏줄로는 여전히 북방족이 주류인 것이 한민족이기 때문에 그들은 같은 핏줄이라는 의식이 남아 있었던 까닭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실은 몽골의 군벌 출신이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소장 동양사학자인 윤은숙(尹銀淑) 박사는 학위논문 ‘몽(蒙)·원(元) 제국기(期) 옷치긴가(家)의 동북만주 지배’에서 “13∼14세기 동북 만주 지역을 원나라의 옷치긴(Otchigin·斡赤斤) 왕가가 지배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며 이들의 지배 영역 안에 이성계 가문의 본거지가 있었다고 말한다. 한민족은 이래저래 북방민족과는 혈통적으로 친연성이 높다.

조선은 한양을 지키기 위해 동서남북 4곳에 유수부를 두었는데 동에는 광주 남한산성, 서는 강화, 남은 화성, 북은 개성이다. 유수는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어전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남한산성에는 또 오늘날의 수도방위사령부 역할을 하는 수어청을 두었다. 이 때문에 유사시를 대비해 항상 50일분의 식량을 비축해두었다. 따라서 남한산성을 지키던 수어청 군사들과 승병이 십팔기를 연무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지금도 남아 있는 연무대, 그리고 그 앞으로는 넓은 연무관이 있었다.

조선 최대의 두 전란을 통해 완성된 십팔기가 단 한 번도 외적에 함락된 적이 없었던 남한산성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일요일 한낮, 남한산성. 어디선가 긴 나각소리가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둥둥둥’ 천지를 진동시키는 북소리가 등산객들의 숨가쁜 심장을 두드린다. 일순 긴장이 흐르다 곧이어 군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오고 기합소리, 창검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환호와 박수 소리에 산새들이 화들짝 놀라 달아난다.

백년을 넘게 잠들어 있던 고성에 갑자기 피가 돌기 시작하고 웅크린 민족의 웅지가 기지개를 켠다. 평소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던 을씨년스러운 수어장대가 창칼 등 각종 무기와 깃발을 든 군사들로 인해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활기를 되찾는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올라온 등산객들도 이들의 위용에 눌려 숨을 죽이고 보다가 병사들의 힘차고 멋진 연무에 탄성과 박수를 보낸다. 십팔기 종목이 하나하나 펼쳐질 때마다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던 관중은 마지막으로 병사들의 실전보다 더 실감나는 교전이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와 떠나갈 듯한 탄성을 지른다.

남한산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잠정 등재되어 있다. 남한산성 문화관광사업단에서는 올해부터 ‘국기 십팔기’를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 정하고, 수어장대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상설로 공연하고 있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지난 4월 시작된 이 행사 명칭은 ‘남한산성 수어청 연무의식’. 수어사가 수어장대에서 군사들의 무예훈련 상태를 점검하고 독려하던 연무의식을 재현해 역사의식과 상무정신을 고양하겠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시작한 지 석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이곳을 찾는 시민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 벌써 자리를 잡았는지 공연시간(11시 반, 12시 반, 13시 반/3회)에 맞추어 수백명씩 몰려들고 있다.

이광희 사업단장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서 십팔기가 펼쳐지게 되어 너무나 만족스럽다. 앞으로도 계속 행사를 발전시켜 남한산성이 중국 소림사를 능가하는 무예 본산이 되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힌다. 현재 십팔기 시연단원들은 최하 5년, 최고 25년의 수련 경력을 가진 최고수들이다. 민족의 자긍심과 고유성을 보여줄 한국의 관광 상품으로 이만한 것이 없다. 경기도뿐 아니라 중앙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병행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수어장대 한쪽에선 십팔기의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무예도보통지’의 국가보물 지정과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를 앞당기기 위한 서명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남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한 복원에는 앞으로도 1000억여원이 더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십팔기와 ‘무예도보통지’를 문화재, 보물로 각각 지정받기 위해서는 그 백분의 일도 안 들어갈 것이다. 사람들은 ‘팔만대장경’, ‘동의보감’만 보물인 줄 알고 ‘직지심경’을 찾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작 손에 쥔 세계 유일의 보물에는 관심이 적다. 무예도보통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기대해본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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