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인인인(人人人) 시리즈’로 기획된 일본 작가 히라타 오리자의 ‘잠 못드는 밤은 없다’(박근형 연출)는 이렇게 향수를 자극하는 일본 엔카(演歌)와 함께 시작된다. 바로 1989년 사망 직전 한국계 일본인임을 밝힌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본명 가토 가즈에·1937∼1989)의 유작 ‘흐르는 강물처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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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 이지메 등 일본의 사회 병리 현상 등을 세밀하게 그려낸 ‘잠 못드는 밤은 없다’의 한 장면. |
조기 퇴직 후 이민온 켄이치(정재진)와 리조트 이웃 치즈코(서이숙)이 한가롭게 독서를 하고 있다. 치즈코가 두 딸이 오기를 기다리는 켄이치와 켄이치 부인인 이쿠코(예수정)와 별 의미없는 일본 생활 이야기를 나눈다. 켄이치의 일상은 단순하다. 산책후 책 읽고, 장기두고, 일본 뉴스 보고, 또 산책하는 그런 생활이다. 하루 세끼 일본 음식을 먹는다. 공간만 열대를 느낄 수 있는 말레이시아일 뿐 일본식으로 살아간다. 골프, 수영, 테니스 등 이곳에 이민 온 이들의 하루 소일 거리는 늘 비슷하다.
리조트에 사는 인물들은 누구나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사연을 갖고 있다. 리조트의 터줏대감으로 불리는 아키라(최용민). 그는 “낮잠 자다 빗소리에 잠이 깼어요. 약주가 유일한 친구라서요”라며 늘 일본술과 함께 산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으로 말레이시아 전선에서 사망한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민온 홀아비다. 그에게는 일본과 말레이시아를 오가는 딸 에미코(주인영)가 있다. 에미코는 아빠 곁을 지켜주고 싶은 미혼 여성이다.
치즈코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 사업하는 남편 코조(김학수)에게 쿠알라룸푸르와 태국 방콕에 애인이 있는 것을 알지만 치즈코는 모른척하며 그냥 살아간다. 일본 DVD 등을 배달하는 하라구치는 일본에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하던 젊은이다. 켄이치는 병에 걸렸다. 딸들은 그를 일본에 모셔가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이다.
단기 체류자의 면면도 흥미롭다. 며칠간 머물러 온 세이지(김도균)-나오에(정희정) 부부. 치즈코의 고교 동창생인 나오에는 남편과 함께 은퇴 후 낭만적인 삶을 꿈꾸며 사전조사 차 이곳에 왔다.
이와 달리 결혼 7년된 하야토(김학수)-마유미(유나미) 부부는 5일간 단기 체류객이다. 서로 재혼 상대가 있는 이들은 이혼을 기념하는 여행을 즐기는 중이다.
공간만 말레이시아로 옮겨온 일본인들의 생활을 그린 ‘잠 못드는 밤은 없다’에서 특별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히키코모리, 이지메(집단 따돌림) 등 현대 일본의 사회병리 현상과 고독한 인간상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대표적인 장면을 보자. 하라구치(박완규)는 일본에서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던 때 늘 누군가를 죽이거나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악몽에 시달리던 청년이다. 치즈코와 꿈을 컨트롤 한다는 세노이족 등의 이야기 등을 나누던 하라구치는 “저 여기와서 누구 죽이는 꿈 덜 꾸게 됐어요”라고 말한다. 마치 일본에서의 아픔이 치유된 것처럼 말이다.
이지메 당한 경험이 있는 치즈코의 경우도 하라구치와 동병상련이다. 치즈코는 동창생 나오에로부터 풍선껌을 선물 받는다. 나오에는 껌 씹던 학창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풍선껌을 선물했다. 하지만 치즈코는 “풍선껌 씹어야 친구로 끼워주니까”라며 이지메 당하지 않기 위해서 풍선껌을 씹었던 쓰라린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나오에를 겨냥해 “절대로 친구 아니야, 절대 못 오게 할 거야. 도대체가, 어딜 가더라도 따라온단 말이야, 일본이…. 어떡하면 좋을 것 같니?”라고 외친다. 하라구치와 치즈코는 부풀린 풍선껌으로 키스하듯 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병든 켄이치는 딸들이 일본에 돌아가자는 간곡한 부탁의 말에도 귀국할 생각이 없다. 석양이 붉게 물든 날 켄이치는 “그래 여기가 좋아라”고 하고 아키라 역시 “어디로도 이제 더 가고 싶지가 않아요”라고 말한다. 어느덧 무대는 석양이 지듯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히라타 오리자는 ‘잠 못드는 밤’은 ‘열대야’(최저 온도가 25도 이상인 밤)를 뜻하고, 열대야는 더워서 견디기 힘든 밤이라고 했다. 결국 ‘열대야는 없다’이고, 그 의미는 열대에 가더라도 일본인은 똑같다, 일본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한결같이 일본으로 돌아오기 싫어한다. 은퇴이민, 질병, 히키코모리, 이지메 등 오늘날 일본, 아니 일본과 그 궤적이 다르지 않을 한국의 사회 병리 현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극이다. 6월6일까지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Space111. (02) 708-5001
신동주 기자 range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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