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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학도들이 글공부하는 모습. |
과거시험은 공부도 공부이지만 응시 절차도 간단하지 않았다. 그중에는 인적 사항을 기록하는 녹명(錄名) 절차도 복잡했다. 녹명은 시험 열흘 전에 하는 게 원칙이었다. 녹명소에 먼저 사조단자(四祖單子)와 보단자(保單子)를 제출해야 했다. 사조단자에는 응시자와 그 아버지·할아버지·외할아버지·증조부의 성명과 관직 등을 기록했다. 보단자에는 신원보증을 위해 6품 이상의 관료 3명의 서명이 있어야 했다. 기록하고 서명하는 과정에서 이름과 신원은 철저하게 확인됐다.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기록해야 했지만,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꾼 이들도 많았다. 조선시대 경상도 진주에 거주하던 선비 하명상이 그런 경우다. 그는 열 살을 넘기면서부터 과거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가 1753년 과거에 급제했다. 1702년생으로 50세가 넘어 과거에 급제했으니, 당시로서도 많은 나이였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양반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특이한 기록이 발견된다. 그의 원래 이름은 자륜이었다. 이어 세륜(19세)→대륜(22세)→즙(34세)→인즙(43세)→정황(46세)→명상(49세)으로 개명했다. 무려 여섯 차례나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 이유를 눈여겨 볼 만하다. 과거시험에 연이어 낙방하면서, 그는 원인을 찾게 된다. 실력과 재주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이름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생각으로 1750년 오십이 다 된 나이에 스스로 개명한다. 하지만, 공식절차를 거친 것도 아니어서, 새 이름으로 응시하면 실격처리될 게 분명했다. 당시 조선 법제에 따르면 다음 식년인 1953년에나 개명이 가능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진주 목사에게 하소연해서 그에게 개명확인서를 받는 것이었다. 40년 가까운 시간 과거를 준비한 절절한 사연과 개명 의지에 진주 목사도 처지를 딱하게 여겼다. 이름을 바꾼 그는 다행히 과거에 급제하게 된다.
조선시대 유생들은 이렇게 과거에 목말라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옛 자료를 모아 엮어 설명한 ‘조선 양반의 일생’(글항아리)에는 국가의 중심세력이면서 때론 조선 사회의 그늘이기도 했던 양반 사회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양반 사회가 화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양반 사회는 자체적으로 규약을 만들었다. 이름을 더럽히면 양반이라도 마을에서 쫓겨나야 했다. 정적에게 박해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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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급제자가 펼친 삼일유가(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친척 등을 방문하는 일)의 한 장면. 과거합격자는 금의환향해 축하를 받고, 합격축하금도 받았다. 신진 관료로서 가슴 벅찬 내일도 꿈꿀 수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고통이 아닌 유배형도 있었다. 정계 복귀를 염두에 둔 정치적 안배로서 유배형이 그랬다. 예를 들어 선조 시절 함경도 길주에 유배가 결정된 조헌은 유배지로 가던 첫날 만찬을 즐기다가 다음날 술독에서 헤어나지 못해 출발을 미루기까지 했다.
가부장적인 조선 사회였지만, 경국대전에는 남녀균분상속이 명시돼 있었다. 이순구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은 “조선의 여성은 상당한 경제적 주권을 지니며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보다 많은 권리를 누렸다”고 평가했다. 소박도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양자를 들이면 해결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식을 출산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조선 시대에 승정원 좌부승지를 지낸 묵재 이문건이 쓴 ‘묵재일기’에 아이에 대한 양반가의 솔직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양반들도 민중과 같이 점을 쳐서 태아의 성별을 감별할 정도였다. 명의 허준도 동의보감에서 “사람의 사는 길이 자식을 낳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 양반은 주변국의 지배계급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었을까. 조선 양반은 중국과 일본의 사대부와 무사와 비교해 볼 수 있다. 미야자미 히로시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중국의 과거제도는 개방적이었던 반면, 조선의 과거제도는 폐쇄적이었다”고 설명한다. 중국은 범죄자를 제외하고 누구나 과거를 볼 수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사실상 양반 가문의 자제만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일본에서 무사들의 지위는 여러 아들 중에서 한 명만 신분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나머지는 신분을 이어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아들들이 양반의 지위를 평등하게 계승할 수 있었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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