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는 세도가들 대동법 등 방해하자 모색
여론반대에 경제력 약해 기초공사만 하고 끝나
반란으로 끝난 고려 묘청의 서경 천도론도
외교 강경·온건파간 권력 투쟁속에서 나와
최근 세종시 문제로 나라 전체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국회에서 통과시킨 합의를 현 정부에서는
너무나 문제점이 많은 사안이라면서 ‘수정’을 추진하고 있다. 원래 노무현 정부에서는 수도를 옮기려는 구상을 했다.
그러나 행정수도를 옮기는 문제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받았고, 그 대안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조성하는 과정을 밟았다.
세종시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역사 속에서 도읍을 옮긴 사례들을 통해 이에 대한 간접적인 해답을 구해 본다.
너무나 문제점이 많은 사안이라면서 ‘수정’을 추진하고 있다. 원래 노무현 정부에서는 수도를 옮기려는 구상을 했다.
그러나 행정수도를 옮기는 문제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받았고, 그 대안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조성하는 과정을 밟았다.
세종시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역사 속에서 도읍을 옮긴 사례들을 통해 이에 대한 간접적인 해답을 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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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에 있는 광해군과 그의 처 문성군부인 유씨의 묘. |
우리 역사에서 수도를 옮긴 사례가 몇 차례 있었다. 먼저 고구려는 지금의 압록강 근처인 국내성에 도읍을 정했다가 5세기 장수왕 때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선왕인 광개토대왕대까지는 요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북방 지역의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였지만 장수왕은 한강 유역을 비롯한 남쪽의 비옥한 땅을 주목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남하정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은 백제의 수도 천도에 바로 영향을 주었다. 원래 백제는 지금의 서울, 한강 일대를 도읍으로 정했다. 현재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는 백제의 유적과 유물이 다량 발견되어 이 지역이 백제의 초기 수도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밀린 백제는 한반도 최고의 지역, 서울과 한강 일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475년 백제의 문주왕은 수도를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겼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문주왕’ 부분에는 “개로왕이 재위한 21년에 고구려가 내침하여 한성을 포위하므로 개로왕이 농성하여 굳게 지키고 문주왕으로 하여금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문주왕은 군사 1만명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고구려 군대가 비록 물러갔으나 성은 함락되었고, 문주왕은 개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10월에 서울을 웅진으로 옮겼다”고 하여 고구려의 침략 후 백제가 도읍을 옮긴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 백제는 더 이상 뻗어나가지를 못했다. 전략상의 요충지인 한강 유역의 상실은 백제 발전에 큰 타격이 된 셈이다.
6세기 성왕(聖王:재위 523∼554)은 백제의 중흥을 추진하였다. 웅진이 수도로서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성왕은 넓은 벌판에 새로운 도읍을 건설할 필요성을 느꼈다. 성왕은 수도를 사비(지금의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북방 지역에서 출발한 백제의 부흥을 꿈꾼 것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힘에 밀려 한성(지금의 서울)을 버리고 수도를 웅진으로, 다시 사비로 옮긴 후 백제는 결국 옛 영광을 찾지 못하였다. 삼국 쟁패의 가장 요충지인 한강 유역의 한성을 포기한 것은 그만큼 국력의 약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결국 백제는 마지막 수도 사비에서 삼천궁녀의 낙화암 전설과 함께 멸망의 길을 걸었다.
#2.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고려의 북진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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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엽 군현지도첩인 ‘해동지도’에 수록된 경도. |
묘청의 서경 천도와 북진정책에 강력히 반발한 인물이 개경파를 대표하는 김부식이었다. 김부식은 금나라의 힘을 인정하고 안정적인 국제관계를 유지하려면 금나라와 사대 외교를 맺는 것이 국익에 훨씬 필요한 것으로 인식했다. 한때 서경 천도에 관심을 보였던 고려 국왕 인종이 김부식 등의 의견을 따라 서경 천도를 없던 일로 하자, 1135년 묘청은 국호를 대위(大爲)로 하면서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진압군의 총사령관에는 그의 라이벌 김부식이 임명되었다. 반란군 내부에서 일어난 묘청의 변사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은 1년 가까이 정부군에 저항을 했다. 그러나 반란이 진압되면서 묘청이 꿈꾸었던 서경 천도 운동 또한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3. 조선 광해군이 천도를 꾀한 사연은
조선의 건국 후 수도가 된 곳은 개성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의 양보를 받는 형식으로 즉위하여 태조는 개성의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개성은 1392년 7월부터 1394년 10월까지 2년여간 조선의 초기 수도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성계와 정도전 등 조선의 건국 주체 세력은 건국과 동시에 천도 작업에 착수하였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는 여전히 구왕조에 미련을 갖고 살아가는 구세력들이 많았기에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던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정했던 것이다.
조선에도 수도 천도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시기가 있었다. 바로 광해군 때였다. 광해군은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천도를 모색했다. 기득권을 지닌 정치세력들이 서울에 거주하면서 대동법을 반대하는 등 개혁정치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술관 이의신이 ‘총대’를 멘 광해군의 교하(交河) 천도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1612년 11월 예조판서 이정귀는 이의신이 제기한 교하 천도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한양이 도성으로서 차지하는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가치를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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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 조선 광해군이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천도를 모색했던 지역인 경기 파주 교하읍의 최근 모습. |
#4. “200년이 넘도록 백성은 평안하고 다스림은 융성했다”
이정귀는 이어서 “당당한 국가가 어찌 일개 필부의 허망한 말을 선뜻 믿어 200년의 굳건한 터전과 살고 있는 수많은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갑자기 일거에 떠돌이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 소장이 들어오면서부터 사람들이 마음을 안정하지 못하고 서로 뜬소문에 동요되어 더러는 ‘성상께서 이 말을 믿는다’ 하고, 더러는 ‘새 궁궐에 나가지 않는 것은 이 말 때문이다’ 하여, 원근이 모두 놀라고 현혹되어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당시의 부정적인 민심을 전한 후에 “이단이 국가에 해독을 끼치는 일이 예로부터 그러했으니, 고려 말엽에는 요승(妖僧) 묘청이 음양의 설로 임금을 현혹하기를 ‘송경(松京)은 왕업이 이미 쇠퇴하였고 서경에 왕기가 있으므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하여 드디어 새 궁궐을 서경 임원역에 지었으나 끝내는 유참 등의 변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예전의 고사도 이와 같은데,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라면서 묘청의 난을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조정에서 반대 의견이 커지자, 광해군은 1612년 윤 11월 5일 교하로 도읍을 옮기는 일에 대해 2품 이상에게 논의하게 하였다. 대신들 중에서는 박홍구가 유일하게 찬성했다고 할 정도로 천도에 대한 지지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광해군은 의지를 완전히 꺾지 않았다. ‘광해군일기’에 1612년 9월경부터 시작해 40여차례 교하 천도에 대한 논의가 거론된 것을 보면 교하 천도가 당시 정국의 ‘뜨거운 감자’였음을 알 수 있다.
1613년 1월 3일 광해군은 비밀리에 비변사에게 교하 지역을 살피고 그 형세를 그려오게 하였다. 광해군은 “예로부터 제왕들은 반드시 성읍을 따로 건설하여 예기치 않은 일을 대비하였으니, 도읍 옮기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교하는 강화를 앞에 마주하고 있고 형세가 심히 기이하다. 독성산성의 예에 따라 성을 쌓고 궁을 짓고는 때때로 순행하고 싶다. 대신과 해조 당상은 헌관·언관·지관과 같이 날을 택해 가서 살피고 형세를 그려 오라”는 명을 내렸다. 광해군은 천도가 아님을 강조했지만, 최종 목표가 천도에 있음은 다음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왕이 이의신의 말을 받아들여서 장차 교하에 새 도읍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중론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8년 3월 24일)
위와 같이 광해군은 교하 천도에 상당한 의지를 가지고 기초공사까지 벌였지만 결국은 중지하고 말았다. 여론의 반대가 극심했을 뿐만 아니라 수도를 옮길 경제력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습지인 데다 험준한 산과 강이 없는 등 수도로서의 부적절한 입지도 고려되었다. 광해군에 의한 천도 운동은 조선 건국 후 220여년 만에 처음 제기된 본격적인 천도 운동이었으나, 한양을 대체할 명분이나 실리가 부족하고 지지세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광해군의 천도 실패는 한 나라의 도읍 천도에는 뚜렷한 천도 동기와 국가적 합의, 그리고 역량이 모아져야 함을 증명해 주고 있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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