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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만쿠조 외 지음/장택수 외 옮김/전진영 감수/생각의나무/4만7000원 |
21세기 광장은 도시공간의 빈터나 여백이 아닌 가장 사랑받는 공동체 자산으로 부각되고 있다. 사이버 스페이스 시대에도 광장은 도시 거주인을 익명성에서 건져내 공동체로 이끌어주는 물리적 공간으로 거듭난다. 2002년 붉은악마들의 환호를 보라.
하지만 서울시청 앞의 빈터는 시민 광장이기 전에 시청 앞 광장으로 아직 ‘누구의 광장’인지 광장 점유 논란은 그치지 않고 있다. 지난 1일 광화문 앞에 조성된 보행자 구역에도 광화문광장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집회·시위를 해도 되는지 논쟁 중이다. 광장문화를 파급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기획물인 탓이다.
이탈리아 베니스의 도시건축학자 프랑코 만쿠조가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대학 등 유럽 5개국 연구기관 연구원들과 함께 쓴 ‘광장’은 오랜 세월 숙성된 광장의 경험을 축적한 유럽 광장 60개의 사례를 통해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책은 아름다운 광장 화보와 함께 역사, 공간구조, 기능을 기록한 광장 사용 설명서이다.
1789년 파리 바스티유 광장처럼 군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사회적 용광로가 되기도 했고, 1922년 로마의 베네치아 광장처럼 새로운 정치이념에 도취한 군중이 집단 최면에 빠지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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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은 도시의 여백이나 빈터가 아니라 팰림프세스트(글자가 거듭 쓰이는 양피지 원고)처럼 기억이 중첩되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내포한 도시생활의 무대다. 이곳은 권력의 과시 무대이자 반란의 장소이며 군중과 고독이 함께하는 곳이다. |
과거에 사상과 가치를 교환하던 광장은 서비스를 교환하고 소비하는 장소가 됐다”는 설명은 2002년 월드컵 당시 서울시청 앞 광장뿐 아니라 마을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졌던 군소 광장들을 떠올리게 한다.
광장의 역할은 거주자의 사회적 지위를 암시하는 ‘주소’의 가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럽에서 주소의 가치는 주 광장에 가까울수록 크며 주소가 주 광장 근처인 사람은 그 사회에서 높은 계층에 속한다. 저자들이 새로이 설계된 광장들에서 현대인의 ‘광장공포증’을 고려한 면모를 발견하는 것도 흥미롭다.
책에서 광장의 역사와 함의를 다룬 1부는 서론에 불과하며 실재하는 개별공간으로서 광장을 찾아 소개하는 데 치중하는 2부가 본론에 가깝다.
광장 바닥에 전통 목조 선박의 현상을 추상화한 유선형 문양을 새겨 역사성과 장소성을 암시한 노르웨이 카벨보그 광장, 광장바닥에 브라질 이페목재를 깔아 누구나 앉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 벨기에 나무르 담 광장, 그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이 들어서는 이탈리아 베르텔리 카보르 광장, 수변 공간에 조경 디자인을 적용해 도심을 활성화한 그리스 아이아스 바바라스 광장, 자연 절벽과 중세 성벽으로 구획되며 페스티벌·콘서트·스포츠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 스위스 벨린초나 솔레 광장, 인파로 북적대며 만남과 소통의 물리적 공간으로 재창조된 프랑스 코메디 광장 등 24개국 60개 광장의 역사와 현재 모습이 담긴 700여장의 사진은 도록을 보는 듯 섬세하고 아름답다. 실체적 공간으로서 광장에 대한 고민은 행간보다 사진이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
김은진 기자 jisland@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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