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장 재판관 지명권 배제
이론적으로 헌재와 대법원은 서로 대등한 ‘최고 사법기관’에 해당한다. 입법·사법·행정부에 이은 제4 국가기관으로 분류하기도 하나 ‘정치적 사법부’로 보는 게 다수설이다. 법조계에서는 현실적으로 대법원 우세를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헌법에 따라 대법원장은 헌재 재판관 9명 중 3명을 지명할 권리를 갖고 있다. 반면 헌재소장은 대법원에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이강국 현 소장을 비롯해 역대 헌재소장 4명 중 3명이 대법관 출신인 점도 무관치 않다.
그동안 법조계 일각과 헌재에서는 “대법원이 헌재를 사법부 인사적체 해소에 활용한다”는 불만이 팽배했다. 대법원장이 대법관 경쟁에서 고배를 마신 고위 법관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재판관으로 추천하는 관행을 지적한 것이다. 현재 재판관 9명 중 판사 출신이 8명이고, 특히 5명이 법원 고위직에서 곧장 헌재로 자리를 옮겨 온 데서 보듯 대법원의 헌재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헌재는 국회 헌법연구자문위원회에 낸 의견서에서 “대통령이 3명, 국회가 6명의 재판관 지명권을 가져야 한다”고 재판관 지명권자에서 대법원장을 배제할 것을 주문했다. 헌재는 “선거로 뽑혀 민주적 정당성을 지닌 대통령과 국회, 두 주체가 재판관 지명권을 행사하는 게 민주주의 원리에 맞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대법원은 개헌이 논의되는 상황이 아닌 만큼 대응을 자제하면서도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대법원장이 국회 동의를 거쳐 임명되는데 선출직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것처럼 인식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반응이다.
9명 중 3명 비법조인 출신 등용
재판관 임명방식 변경과 마찬가지로 재판관 자격을 바꾸는 문제도 헌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다. 헌재는 국회 헌법연구위에 보낸 의견서에서 “재판관에게 ‘법관의 자격’을 요구한 헌법 조항을 고쳐 재판관 자격을 헌법 대신 법률에 구체적으로 정하도록 위임하자”고 제안했다.
헌재는 재판관 9명 중 6명을 지금처럼 사법시험에 합격한 법조인으로 임명하되 3명은 학자, 정치인, 외교관, 행정관료 등 다양한 직업군에서 충원하자는 입장이다.
헌재 관계자는 “헌법재판은 법률전문가에 의해 이뤄지는 게 원칙이지만 다원적 가치관과 철학을 가진 재판관도 필요한 만큼 이를 조화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헌재 재판부 구성의 다양화는 그동안 시민단체와 학계에서 줄기차게 요구한 사안이기도 하다. 법학자 대부분이 비법조인 출신의 재판관을 두고 있는 외국 사례를 들어 우리 헌재도 문호를 넓힐 것을 주문했다. 이헌환 아주대 법대 교수는 “지금은 법조인이어야만 재판관이 될 수 있으나 사회의 여러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비법조인도 재판관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법조인의 재판관 임명은 사법기관이라는 헌재 본질을 해칠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헌재는 자질검증을 강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즉 비법조인이라도 반드시 법률전문가, 특히 헌법이나 헌법재판 전문가로 구성된 ‘재판관 후보자 추천위원회’ 검증을 거치도록 하면 문제 소지가 줄어들 것이란 입장이다.
독일·미국과 다른 제3의 위헌심사
그동안 우리나라 헌재는 서로 다른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와 미국 연방대법원을 모델로 조직과 운영방식을 정비해 왔다. 그렇다 보니 세계에서도 드문 시스템이 돼 버렸다. 즉 독일은 헌재가 대법원보다 우위에 있는데 비해 미국은 대법원이 헌재 기능까지 수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헌재와 대법원이 별도 기관이지만, 독일처럼 헌재가 대법원보다 상위에 있는 건 아니다.
헌재는 우리만의 독특한 체제에 맞게 독일이나 미국과 다른 위헌심사 방식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강국 헌재소장도 기자간담회에서 “위헌심사 기준과 재판 방식 면에서 독일은 너무 철학적이고 미국은 너무 실용적이라서 같은 사안도 독일에선 합헌, 미국에선 위헌 결정을 받을 수 있다”며 “우리는 이 두 모델을 뛰어넘는 ‘제3의 길’을 찾아내 새로운 국제적 기준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헌재는 지난해 주최한 ‘세계 헌법재판소장 회의’에서 우리나라 헌법재판 제도와 운영 실태를 세계 각국에 널리 알린 바 있다. 당시 참석자들은 헌정사가 짧은 한국에서 헌재가 왕성히 활동하면서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크게 미치는 데에 놀라움을 나타냈다고 한다. 아시아 각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헌법재판 모델에 주목했다. 몽골과 인도네시아, 대만, 태국, 옛 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우리 모델을 본떠 헌법재판소를 설립했다. 헌재는 이들과 함께 ‘아시아 헌법재판소 연합’ 창설을 준비 중인데, 이동흡 재판관이 준비위원장으로 활악하면서 우리나라 위상을 반영하고 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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