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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극단에서 앙상블 연기를 15년간 하면서도 “뜨고 싶다는 조급함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는 서이숙. 그 모습이 장작불로 데워진 가마솥을 닮았다. |
서이숙은 3월의 ‘리어왕’, 16일 개막하는 ‘피카소의 여인들’을 시작으로 올 한 해만 6개 대작 연극에 출연한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스케줄. 그러나 인터뷰를 위해 대학로 카페에 들어선 서이숙은 언제나처럼 느긋했고 꾸밈없었지만 생기에 넘쳐났다.
◆“20년을 굶었는데 못할 게 뭐가 있나”=15년여의 무명 배우 시절 끝에 폭죽 터뜨리듯 연기의 꽃을 만개하고 있는 서이숙에게 연출가 한태숙은 “우리나라 여배우 중 드물게 남성성과 여성성을 겸비한 배우”라고 했다. 그가 구축해온 캐릭터들은 전무후무한 것들이다. 뮤지컬 ‘정글 이야기’에서는 남자배우가 신체훈련 과정에서 포기한 늑대대장 역을, ‘열하일기만보’에서는 말로 환생한 연암 박지원을, ‘빵집’에선 춤 노래 해설로 극을 이끄는 해설자 역 등을 열연했다. 여자로서는 연기하기 힘든 배역만 골라왔다고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오래 굶었는데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내가 무대에 조금 더 많이 얼굴을 드러내며 재미있는 걸 보여주게 생겼는데 말이에요. 앙상블 시절, 한 장면에라도 더 나오게 되면 얼마나 좋아했던가 떠올리면 신이 나요. 예쁘게 보이고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수원시 농촌진흥청 배드민턴 코치로 일하던 1986년 ‘반공무원’ 생활이 답답해 스무 살 나이에 입단한 곳이 극단 수원예술극장. 88년 전국연극제에서 노인 연기로 여자연기상을 받은 뒤 극단 미추에 들어갔다. 연극사관학교 같은 커리큘럼이 맘에 들어서다. 이제 극단의 여배우 넘버 2로, 김성녀를 이을 연기파배우로 자리매김한 그에게 그간 유혹이 없었을 리 없다. “좋은 배우가 미추에서 썩고 있다. 나오면 기회가 많다”는 “늑대의 유혹”이 들릴 때마다 ‘더 곰삭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같은 꿈을 가진 극단 배우들끼리의 부대낌이 좋았고 서로에 대한 연민으로 의지했다”고 털어놓았다.
“전 지금도 동료, 후배들이 연습실 마루를 쓸고 닦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떨려요. 배우들에겐 신전과 같은 곳이지요. 몸 풀고 뒹굴며 집중하는 연습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내 연습 장면이 없다고 자리를 비우면 금방 티가 나요. 이상하게도 연기에 이물질이 묻어나죠. 난로 앞에서 졸고 있더라도 연습실에서 함께 호흡한 공기가 그대로 무대 위 에너지로 승화됩니다.”
◆연기, 그 접신(接神)의 순간을 위해 산다=연극 ‘피카소의 여인들’에서 서이숙은 피카소의 첫 번째 부인 올가를 맡아 30분간 혼자 무대를 채운다. 4인의 여배우가 각각 피카소의 여인으로 분해 차례로 무대에 올라 피카소에 대한 애증을 토로하는 특이한 1인극이다. 여배우라면 누구나 꿈꾼다는 모노드라마. “원래 모노드라마를 싫어한다”는 서이숙의 말은 의외였다.
“연기라는 게 상호작용을 통해 생성되는 에너지인데, 배우가 혼자 신들린 듯 관객을 몰아간다는 게 거짓처럼 느껴졌거든요. 무대라는 곳이 배우가 감정을 해소하는 장이 되면 안 된다는 게 제 철학이에요. 무언가를 쏟아내기보다 감정을 아끼고 걸러서 절제된 표현으로 관객의 뒤통수를 툭 치는 감동을 주고 싶어요.”
연기스승인 김성녀와 각각 피카소의 여인을 맡아 한 무대에 번갈아 서는 소감을 묻자 “떨려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미추에 입단해 김성녀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화술가로부터 돈 안 내고 화술을 배웠지요. 두성, 비성을 자유자재로 쓰면서 발성만으로 대극장 무대를 쥐락펴락하며 공명시키는 김성녀 선생님을 보고 있으면 정말 입이 딱 벌어져요. 제가 부상했을 때도 진통제 먹고 나가 연기하라고 주문한 혹독한 스승이죠.”
김성녀와 함께 배우 서이숙을 키운 것은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응원. 멀미 때문에 딸의 무대를 찾지 못하는 어머니는 경기 연천의 집에서 TV로 마당놀이 앙상블을 하는 딸의 모습을 보고도 날카롭게 연기 지적을 해준다. 최근 잇따른 상찬에도 딸보다 더 담담한 사람이 그의 어머니다. “언제는 우리 딸이 최고 배우가 아니었어?”라는 게 어머니의 반응이었단다.
‘조급증’이란 단어를 모르는 뚝배기 같은 이 배우의 식지않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궁금해졌다. “연기를 하다 접신(接神)이 되는 순간, 내가 아닌 나를 발견하는 게 너무 재밌다”는 그는 연기에만 집중하기 위해 최근 맡아온 대학 강의들을 모두 정리했다.
20년 만에 배우로서 전성기를 맞고 있는 서이숙은 요즘 관객의 박수 중독성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중이다. “‘고곤의 선물’을 하면서 대극장 관객들로부터 전원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그러다보니 점점 더 센 박수를 받고 싶어지고, 작품 사이의 공백이 외롭고 힘들어지데요. 박수에 대한 조급한 갈망이야말로 제살 깎아 먹기인데, 이 마음을 빨리 비워야지요.”
김은진 기자 jisland@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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