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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茶를 마시며] (5)세상 속 '나눔포교' 본보기 의정부 포교원 혜승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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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2-05 21:20:56 수정 : 2009-02-05 21: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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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대중이 스승인데 산속엔 뭐하러 들어가”
◇혜승 스님이 양주시청 근처에 있는 연화요양원에 들러 이곳에서 생활하는 극락화(95) 보살의 손을 잡으며 “노보살님이 불교공부에 어찌나 열심이신지 법화경 박사 가 됐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2동에는 머리에 3층 탑을 이고 있는 현대식 4층 건물이 우람하게 서 있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고, 옆에 너른 체육시설을 끼고 있어 더욱 돋보인다. 3층 동탑이 안테나처럼 보여 언뜻 보면 마치 방송국 같다. 바로 대한불교조계종 대종사 혜승(74) 스님이 주석하는 ‘의정부 포교원’이다. 대부분의 노스님은 산속에 묻혀 사는데, 왜 혜승 스님은 소음도 많고, 공기도 탁한 도심 한가운데 내려와 있을까. 더욱이 도심 포교당은 수행자의 신상이 유리알처럼 노출되는 데다 시도 때도 없이 불자들이 찾아와 쉴 틈을 주지 않아 젊은 스님들조차 꺼리는 곳이 아니던가. 그윽한 표정으로 염주를 돌리던 노스님이 단호하게 말문을 뗐다.

“도시 생활이 북적대기는 해도 사람 사는 것 같잖아요. 화합하면서 보람도 느끼고, 대중 속에서 살면 잘못된 습성도 고치고, 모두가 스승이기에 말없이 배우는 것도 많아요. 무엇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약한 불교로서 포교당 운영은 긴요하지요.”

#도심 포교당 짓고 ‘새싹포교’ 펼쳐

18년 전이었다. 의정부 시내에 70여 개의 절이 있었지만, 대부분 점이나 봐주는 무속 신앙 수준이었다. 누군가 나서 올바른 불교를 전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때, 도봉산 원각사 주지로 있던 혜승 스님에게 그 일이 떠맡겨졌다. 당시 의정부에는 130명이 넘는 거사회(居士會·남성불자)가 조직돼 왕성한 활동을 펴고 있었다. 거사회에서 도심에 절을 짓고 싶어 애를 태우다 공심(公心)으로 불타오르던 혜승 스님에게 무작정 도움을 청한 것. 스님도 평소 도심 속 사찰을 꿈꿔온 까닭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지만, 승낙하고 말았다.

함께 힘을 모으자고 다짐을 받아낸 혜승 스님은 우선 속가 아버지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전답을 판 돈 1억2000만원을 종잣돈으로 삼아 부지 매입에 들어갔다. 현재의 포교원 부지는 의정부에 마지막 남은 왕실 땅이었다. 스님은 이어 ‘의정부 전 불자가 주인이 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재단을 만든 뒤, 동참금을 모았다. 1000만원을 쾌척한 불자도 6명이나 나와 금세 2억원을 확보했다. 원각사와 회암사 신도 대상으로 불상 장엄 기금을 조성해 다시 1억원을 모으는 등 총 6억원이 거두어지자 포교당 건립에 들어갔다. 신도 중에서 건설업 면허를 가진 사람이 있어 건축비가 크게 절감됐지만, 그래도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을 짓는 데 총 8억5000만원이 소요됐다.

“전국에서 몇째 안 가는 최신식 포교당이었어요. 신도들의 자긍심도 대단했지요.”

경기 북부 전 불자들의 지극한 정성이 투영된 의정부 포교원은 1991년 완공 순간부터 활기를 띠었다. 우선 1, 2층에 유아원을 운영했다. 현대식 시설에 매료돼 첫해부터 90명의 유아가 몰려왔다. 또 인근에 군부대가 많다 보니 군법회도 차고 넘쳤다. 여성 불자 20여명으로 연화합창단을 만들고, 의정부 택시기사 중심으로 ‘운불연’도 조직했다. 최상의 화음을 자랑하는 합창단은 행사 때마다 지역사회에 빛을 던졌고, 친절한 매너를 가진 운불연 기사들은 의정부에서 불교를 알리는 데 일등공신이 돼주었다. 스님은 푸드뱅크도 창설해 성공적으로 운영하다가 의정부사암연합회로 넘겨줬다.

포교원이 ‘새싹포교’를 펼치며 안정적으로 자리 잡자 다음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노인요양원이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병으로 죽든, 천수를 다하고 죽든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런데 죽을 때는 고통도 미련도 없이 편안히 가야 하는데 저 세상이 낯선지 대체로 고통스러워한다. 혜승 스님은 임종을 앞둔 불자들을 찾아다니다 그들이 염불을 들으며 편안하게 운명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따라 평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불자들이 마지막 삶을 불교 요양원에서 보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또 한가지는 임종을 맞는 분들에 대한 예우면에서 불교가 기독교보다 훨씬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불교에서는 환자를 위해 고작 한두 번 찾아가 독경을 해주고 돌아가면 그만인데, 기독교는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아침저녁으로 찾아다니며 기도와 찬송을 불러주는 것이었다. 수십년 동안 부처님만 믿고 살던 노보살(여성 불자) 한 분이 기독교의 이러한 헌신적 태도에 감동한 나머지 혜승 스님이 찾아가자 눈물을 흘리며 “스님, 저 개종하려고 합니다”고 하더란다. 스님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

“다른 불자는 몰라도 적어도 경기도 북부 신도만이라도 여생을 부처님 품안에서 편히 살 수 있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꽃대궐로 꾸며지는 연화요양원

요양원 건립의 원(願)을 세운 스님은 2001년 양주시청에서 1㎞ 남짓 떨어진 곳에 임야 1만3000평을 사들여 연화사를 짓고, 사재를 털어 경내에 저소득층을 위한 소규모 요양원을 조성한 뒤, 지성으로 꽃을 심었다. 봄이면 꽃대궐을 이루는 연화요양원에는 6명의 노인이 입주해 살고 있다. 기도하는 스님 두 분이 노인들을 보살피며 함께 거주한다. 혜승 스님을 따라 요양원을 찾아가자 노보살들이 크게 반긴다. 요양원의 가장 연장자인 극락화(95) 보살은 “처음 요양원에 들어올 때만 해도 6남매 모두가 ‘좋은 집 놔두고 자녀 망신을 준다’며 못마땅해했는데, 지금은 ‘어머니의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기뻐한다”며 흐뭇해했다. 법당이 가깝고, 공기가 맑은 요양원 생활이 행복한지 노보살들의 표정은 모두 밝았다.

스님은 의정부 포교원장으로 재직 중 문중의 간청에 못 이겨, 2002년부터 4년 동안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경북 의성 고운사 주지 소임을 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정부 지원을 받아 전국 교구본사 1호로 고운사 주차장 옆에 50명가량이 입주할 수 있는 요양원을 만들었다. 당초 ‘염불전’을 만들려고 점찍어 두었던 자리로, 햇볕도 잘 들고, 오가는 사람이 쉽게 들를 수 있는 천하명당이었다. 혜승 스님은 당시 요양원 건립을 적극 지원해 준 의성군수를 지금도 잊지를 못한다. 스님은 고운사에 있을 때 수천 그루의 묘목을 심으며 도량 안팎을 정비했는데, 언젠가 지역경제에 기여하는 아름다운 관광자원으로 태어날 것이다.

“불교는 스님들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중생은 물론, 미물까지도 더불어 살며 행복을 느껴야 하지요. 못사는 사람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때론 남의 것을 범할 수밖에 없어요. 나에게 넘치는 것을 미리 나누어 줘 모두가 근심 걱정 없게 살게 하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그는 17살에 출가했다. 모친을 잃은 상심이 컸고, 시골에서 평생 살아봐야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넓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싶은 충동이 몰아쳤다. 그 무렵, 조카가 당대의 대선객 윤포산 스님의 상좌가 돼 돌아왔는데, 어찌나 아는 것이 많고 행정에 밝은지, 그 길로 포산 노스님이 있는 논산 개타사로 찾아가 불교에 귀의해 버렸다. 혜승 스님은 천생의 불교수행자로 태어난 듯, 행자 생활이 아무리 고달파도 집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경을 읽고 싶어 남몰래 불도 안 땐 냉방에서 밤늦도록 공부하다가 폐병에 걸려 절에서 쫓겨나다시피 해 집으로 보내졌건만, 치료 도중 절로 돌아와 버렸다.

#평생 ‘바보로 살 것’ 다짐

폐병을 앓으면서도 포산 노스님을 열반 때까지 3년 동안 시봉한 그는 5년여의 긴 행자 생활을 마치고 해인사 백련암, 남해 보리암 등 전국 산하를 수행처 삼아 제방 선원을 돌았다. 그가 병마와 싸우며 오랜 만행 끝에 도봉산 쌍용사를 거쳐 원각사에 안착한 것은 1965년 31살 때였다. 당시 논산 관촉사에서 총무 소임을 살던 사숙인 혜원 스님이 자신의 은사였던 포산 노스님을 정성껏 봉양했다는 감사 표시로 “몸이나 추스르라”며 소개해준 곳이었다. 그 무렵 혜승 스님의 총기는 정상을 뛰어넘었다. 법문도 야무지게 잘했고, 책을 읽기만 해도 내용이 쏙쏙 기억됐다. 한번 들은 신도들의 가족 상황을 줄줄 외울 정도였다. 그러나 폐병은 여전히 완쾌되지 않았고, 위장까지 탈이 나 얼굴은 까맣고 몸은 바짝 말라 들어갔다.

“그때 두 가지가 떠오르더군요. 모든 일에 신경을 끊고 바보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총기를 발휘하며 불꽃처럼 타올랐다 죽을 것인가 고민 끝에 바보로 한 생을 살기로 마음을 돌렸지요.”

기억이 고이면 무섭게 흘려버렸다. 오직 울력에만 정진했다. 음식을 먹으면 토했지만, 하루 8시간씩 1000일 기도를 두 번하면서 뜸으로 위장을 다스리고, 항생제를 투여해 폐병도 고쳤다. 끝내 병마와 싸워 이긴 것이다. 투병 중에도 원각사와 회암사를 크게 일으켰으니, 무서운 병마도 그의 구도 열기를 꺾지 못했다.

스님은 회암사에서 14년 동안 주지 소임 살 때를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모든 재정을 신도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며, 신도 모두가 주인이 됐던 활기 넘치던 시절이었다. 그러고 보면, 긴 수행의 여정에서 혜승 스님은 한 번도 공임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살아온 셈이다.

“팔만대장경을 통틀어 얻을 수 있는 부처님의 큰 가르침 두 가지는 물질(육체)과 정신(마음)의 근본을 깨치는 것이죠. 첫째 물질의 근본은 너와 내가 하나이니 이 세상 모든 생명체를 내 몸처럼 생각하고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 마음의 근본은 본래 아무것도 없으니,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대자유의 삶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불교를 ‘나눔의 종교’라고 했던가. 스님은 늘 불자들에게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라’ ‘만나는 사람마다 이익을 주라’ ‘애경사에 동참하라’고 주문한다. 이 세상은 마음만 먹으면 지식·기술·생활정보·자비·지혜 등 나눠 가질 것이 천지다. 나누면 누구도 모자람이 없게 되고, 평화 세상이 절로 도래한다는 것이 스님의 주된 생각이다.

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에 있을 때 정도원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었다. 소탈한 웃음과 넉넉한 마음을 가진 은사 스님은 어느 모로 봐도 천진불이었다. 평생 경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시봉 한번 받지 않았던 도원 스님은 “생활이 곧 법이어야 한다”며 오직 계율을 생명처럼 지키며 살다 갔다. 어느덧 자신도 중생의 어버이가 돼버린 혜승 스님. 그는 언제까지나 복닥거리는 도심 속에서 대중과 살고 싶어했다.

의정부=글·사진 정성수 선임기자 hulk@segye.com


>> 혜승 스님은

1956년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판오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71년 남양주 봉선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남해 보리암 등 제방 선원을 돌다가 도봉산 원각사와 회암사 주지를 거쳐 16교구 본사인 의성 고운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지난해 4월 원로의원에 선출됐으며, 현재 고운사 회주이자 의정부 포교원장으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혜승 스님은 국립공원 내 시유지여서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도봉산 원각사를 어렵게 불하 받아 주석하면서, 의정부에 포교당까지 개원해 경기북부 지역 포교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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