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정치중심지 워싱턴에서 자동차로 2시간여 떨어진 남북전쟁의 격전지 펜실베이니주 게티즈버그. 미국의 경제상황만큼이나 차갑게 불어대는 산바람에도 이곳을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탄생 200주년이자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는 2009년, 게티즈버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은 예년과 사뭇 다르다.
링컨 대통령이 145년 전 미국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이곳은 버락 오바마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순례지가 되고 있다. 하루 평균 1만1000명이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을 관리하는 곳은 미 내무부의 국립공원서비스 산하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이다. 지난 연말 공원 내 설치된 미국시민전쟁 게티즈버그박물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영화관이 눈에 들어왔다. 22분짜리 다큐멘터리는 남군과 북군이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간 이 곳에서 치렀던 전투를 재현하고 있다.
영화의 제목은 “a new birth of freedom.”(새로운 자유의 탄생)
버지니아에서 북쪽으로 진격하던 로버트 리 장군의 남군이 게티즈버그 구릉지대에서 북군과 조우했다. 승승장구하던 남군과 배수진을 친 북군은 무력을 총동원했다. 양측에서 무려 16만5000여명이 이 좁은 곳에서 격돌했다. 기세등등하던 리 장군은 다수의 희생을 치른 뒤 퇴각했다. 이로써 노예해방을 기치로 내걸었던 북군이 대세를 장악하게 됐다. 하지만 3일간 전투의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양측에서 사상자 및 실종자가 무려 5만1000여명 발생했다.
조그만 촌동네 게티즈버그는 졸지에 주검과 부상자로 뒤덮였다. 구릉에는 채 묻히지 못한 병사들의 시신이 나뒹굴었다. 건물마다 부상한 병사들이 고통을 호소했다.
긴급 치유에 나선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앤드루 커틴은 변호사 데이비드 윌스에게 국군묘지를 조성할 것을 위임했다. 윌스는 11월 19일 국립묘지 봉헌식에 맞춰 링컨 대통령에게 “약간의 적절한 언급(a few appropriate remarks)”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주연사는 당시 연설가로 유명했던 에드워드 에버렛이었으며 그에게 두 시간이 할당됐다. 이어 등단한 링컨 대통령은 이제 막 조성되기 시작한 묘지 앞에서 군중에 둘러싸여 2분 만에 연설을 마쳤다. 그야말로 코멘트에 불과했다.
하지만 링컨 대통령은 이 짧은 연설을 통해 폐허의 더미에서 신음하는 게티즈버그에 미국의 희망을 불어넣었다.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a new birth of freedom)을 하게 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연설문 마지막을 장식한 이 문구는 이후 불후의 명문장이 됐다.
노예해방을 내세운 링컨 대통령이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선언한 지 146년 만에 미국은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젖혔다.
미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된 오바마 당선자는 1월 20일 취임식 연설의 테마를 ‘새로운 자유의 탄생’으로 골랐다. 오바마 당선자는 지난해 11월 5일 새벽 시카고 그랜트공원에서 당선 소감을 밝히는 연설에서도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문구를 인용해 링컨의 유업을 이어갈 뜻을 분명히 밝혔다.
남북전쟁 시리즈물로 유명한 TV프로듀서 켄 번스는 지난해 11월 19일 이곳에서 게티즈버그연설을 기념하는 강연을 통해 링컨 대통령과 오바마 당선자의 유사성을 찾으면서 기대감을 표시했다. 링컨 대통령이 미국 정치무대의 중심에 섰을 때 그는 정치경험이 일천한 일리노이 출신 변호사에 불과했다. 이 같은 점에서 오바마 당선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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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게티즈버그 연설 원고 초안을 들고 있는 데이비드 윌스의 집에 들어가는 동상이 게티즈버그 시내에 서 있다. 동상 앞에 공사 중인 윌스의 집은 링컨 탄생 200주년이 되는 올 2월 12일 박물관으로 단장돼 재개장될 예정이다. |
6000에이커에 달하는 게티즈버그 전쟁터는 아직도 남북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시 곳곳에 대포를 설치한 벙커와 돌로 쌓은 바리케이드가 보존돼 있다. 이 지역에는 1400여개의 기념물과 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이 같은 보존사업은 국립공원서비스가 주도하고 있지만 ‘게티즈버그프렌즈’의 역할도 주목할 만하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조직인 ‘게티즈버그프렌즈’는 이 지역을 보존하기 위해 1989년 팔을 걷어붙였다. 회원 수가 2만여명에 달하는 이 단체는 울타리 페인트작업과 유적물 복구작업, 전투지 보존활동, 유물 기부활동, 전쟁터복구모금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전투지를 통과하던 수도 시설물과 배수관, 전신주 등을 옮기는 청원작업도 벌였다.
게티즈버그 시내 한복판에서는 겨울 바람을 뚫고 ‘링컨의 방문’을 복원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링컨 대통령이 연설문을 마지막으로 손질했던 데이비드 윌스의 집을 박물관으로 재개장하기 위한 마무리 작업이었다. 링컨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작성한 원고 초안을 이곳에서 밤새 다듬었다고 한다. 윌스의 집은 링컨 대통령 탄생 200주년이 되는 올 2월 12일 개장될 예정이다.
윌스 집앞에는 링컨 대통령과 윌스가 원고를 들고 금세라도 집으로 들어설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작품제목은 ‘재방문’이었다. 1월 20일 취임할 오바마 대통령의 방문을 예고하는 듯한 제목이다.
게티즈버그 전투의 사료와 유물들을 모아놓은 게티즈버그박물관은 미국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박물관이 자랑하는 것은 가장 치열했던 게티즈버그 전투 3일째(일명 피켓의 공세)를 그림으로 묘사한 사이클로라마(원형파노라마). 프랑스 화가 폴 필리포톡스를 비롯한 화가 20명이 1884년 제작한 대형그림으로 게티즈버그 전투의 전 장면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펼쳐놓았다.
이곳에 눈에 뜨이는 전시관은 대통령이 되기 전 링컨이 1858년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옛 주청사 빌딩 앞에서 공화당 상원 후보 수락연설 때 행했던 ‘분리된 의회’(House Divided)연설 기념관이다. 링컨은 노예해방 문제를 둘러싸고 의회 내에서 의견이 양분된 것을 두고 “그 자체적으로 분리된 집은 버티고 서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의회의 단결을 호소했다. 오바마 당선자는 2007년 2월 같은 장소에서 대통령 출마선언을 했다.
게티즈버그를 찾는 미국인들은 링컨의 역사 인식을 되새기면서 오바마 당선자가 혜안을 갖고 미국을 이끌어주길 기대했다.
친구와 함께 이곳을 찾은 짐 스터드니키(35·메릴랜드주 볼티모어)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를 다시 살펴보기 위해서 방문했다”면서 “오바마 당선자가 금융문제 등 각종 위기에 빠진 미국을 건져낼지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톰 와치터 주니어(34·메릴랜드 페리홀)는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가 미국의 역사를 또 한번 진전시킬 역량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바마 당선자가 이곳을 방문해줄 것을 바라는 기대감도 높다.
게티즈버그박물관의 홍보담당 케이티 로혼은 “200주년기념 사업회가 올 11월19일 게티즈버그 연설을 축하하는 날 오바마 대통령을 초청할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게티즈버그=한용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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