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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⑮국제감각 돋보인 서희와 광해군의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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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6-18 09:39:04 수정 : 2008-06-18 09:3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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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국들 사이서 균형외교로 실리 찾아
◇서희 동상
최근 정국을 강타하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 파동과 촛불 시위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외교이다. 미국과 맺은 성급한 소고기 협상 외교가 이처럼 큰 파문을 몰고 올지는 정부 당국자들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쪽으로 눕자니 저쪽이 걸리고 저쪽으로 눕자니 이쪽이 걸린다”는 외교통상부 장관의 고충 섞인 발언은 미국, 중국, 일본 등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실용적이면서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 외교’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강국에 둘러싸인 지정학 여건 때문에 한반도의 운명은 외교적 성패가 좌우한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도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외교적 선택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였다. 이 중에서도 고려시대 서희의 외교와 조선중기 광해군의 외교는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평가받는다.

#1. 국제 정세를 간파한 서희의 외교력

후삼국을 통일한 지 50여년이 지난 무렵인 10세기 후반, 고려는 서북방에서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의 위협에 직면했다. 역사적으로 오랜 원한도 있고, 중국 대륙까지 넘보던 거란은 993년 소손녕을 대장으로 하여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해 왔다. 놀란 고려 조정은 서경(지금의 평양) 이북의 땅을 거란에 분할해 주자는 주장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솔군걸항(率軍乞降·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항복을 하자)’의 주장까지 나왔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거란과의 외교적 담판을 주장하고 자신이 직접 회담의 대표로 나서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서희(徐熙·942∼998)였다. 담판 결과는 거란의 80만 대군을 돌려보냈을 뿐 아니라, 거란이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던 압록강 유역의 강동 6주까지 고려의 영토로 인정받는 예상외의 엄청난 수확을 얻었다. 어떻게 이러한 협상이 가능했던 것일까? 당시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거란의 소손녕은 고려가 국경을 맞대면서 왜 송나라에 하는 것처럼 거란에 조공을 바치지 않느냐고 서희를 윽박질렀다. ‘조빙(朝聘)’이라는 말을 쓰면서 고려가 거란과 국교를 맺고 예를 갖추라는 것이다. 이것은 거란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태도에서 한발 물러선 것으로서 거란이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자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서희는 이 제안을 바로 수용하지 않고, ‘환아구지(還我舊地)’, 즉 ‘고려의 옛 영토를 돌려 달라’는 것을 협상 카드로 내세운다. 거란과 국교 수교의 전제 조건으로 압록강 일대 강동 6주를 고려 영토로 인정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결국 소손녕은 서희가 제시한 조건을 거란의 왕에게 알리고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중국 송나라와의 외교 단절과 거란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워 993년부터 1018년까지 3차례에 걸쳐 자행된 거란의 고려 침입을 묘사한 그림.

당시로나 지금의 입장에서 봐도 거란에는 불리하고 고려에는 매우 유리한 이 조건을 거란이 수용한 것에는 당시의 국제관계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거란은 원래 한족이 세운 송나라의 영토인 북경 지역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여세를 몰아 중국 본토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거란과 북경 지역을 회복하여 거란의 침공을 차단하려는 송은 운명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거란의 주된 공격 대상은 송나라였고, 고려에 파견한 군사를 뽑아 송나라 침공에 ‘올인’해야 했다. 그런데 압록강 주변에는 고려 군대의 성이 곳곳에 있어서 거란 군사의 퇴각은 만만치가 않았다. 더욱이 장기전에 들어간다면 거란군은 완전히 포위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송나라 대군이 거란을 침입해 올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 거란은 고려와 ‘평화적인’ 외교를 수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고, 거란의 이러한 의중을 서희는 정확히 파악했던 것이다. 실제 거란은 고려의 정복보다는 고려가 송과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려를 침공한 측면이 컸다. 따라서 고려로부터 송과 연합하지 않고 거란과 국교를 맺겠다는 서희의 약속을 받아낸 이상, 자신들이 관리하기에도 힘든 압록강의 강동 6주는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카드였던 셈이다. 서희는 고려와의 국교를 목표한 거란의 심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당당히 강동 6주를 요구했고, 이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과 후금군의 전투를 그린 ‘사진검격도’(위)와 조선군의 투항 장면을 그린 ‘양수투항도’.
서희의 뛰어난 외교 역량으로 압록강 동쪽 280리 강동 6주 지역은 완전히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거란 80만 대군의 침입이라는 국난을 당하면서도, 냉철한 국제 정세 인식으로 고려를 지키고 나아가 영토 확장까지 꾀한 서희. 서희는 위기를 기회로 만든 뛰어난 외교 전문가였다.

#2. 당대의 지지를 받지 못한 광해군의 실리 외교

임진왜란 이후에 즉위한 광해군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제는 전란의 상처들을 극복하고 민심을 수습해 가는 것이었다. ‘폐모살제(廢母殺弟·어머니를 폐위하고 동생을 죽임)’로 대표되는 정치적 실패의 반대편에는 토지대장인 양안의 정비, 대동법의 실시, 왕명에 의한 ‘동의보감’ 편찬 등 대내적 성과도 컸던 왕이 광해군이었다.

그런 광해군의 능력을 보다 돋보이게 하는 요소는 외교정책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시기 북방의 국제정세는 변화의 조짐이 농후했다. 전통의 강국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내온 것이 부담이 되어 국력이 한층 약화되었으며, 이 틈을 비집고 압록강 북쪽의 여진족 내부에서는 누르하치가 중심이 되어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616년 국호를 후금이라 하고 누르하치는 ‘왕’이라 칭하였다.

역대로 중국을 위협하던 북방족이 현실의 강국으로 자리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조정을 둘로 나눔) 활동을 하면서 참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광해군은 당시의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전통적 우방 명과 신흥 강국 후금 어느 한 쪽에도 기울지 않는 외교정책이 전후 복구가 시급한 조선사회의 최선의 방책임을 절감했다.

1619년 광해군의 외교 노선은 시험대에 올랐다. 후금의 압박에 시달리던 명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요청한 것이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도움을 받은 빚도 있고 하여,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광해군은 고심 끝에 파병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왕의 통역관으로서 신임이 두터웠던 강홍립을 따로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도원수의 직책을 부여했다. 전쟁 상황을 보아 후금에 투항해도 좋다는 밀지와 함께였다.

광해군의 심중을 헤아린 강홍립은 명의 원군으로 전투에 잠시 참여하다가 곧바로 후금 진영에 투항한 후 ‘후금과의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취지의 광해군 입장을 전했다. 조정에서는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않은 채 바로 오랑캐에게 항복한 ‘역장’ 강홍립을 처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광해군은 끝내 강홍립을 보호하였다. 후일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세력은 강홍립을 일컬어 ‘강오랑캐’라 멸시했지만, 강홍립은 광해군의 국제 인식을 충실히 수행한 장군으로서 앞으로 재조명되어야 할 인물이다.

조선이 자신들과 친교의 뜻이 있음을 확인한 후금은 조선 침공은 유보한 채 명나라 공격에 주력군을 파견함으로써 광해군대에는 국제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후금과의 일촉즉발 전쟁의 위기 상황 속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냉철하게 현실을 인식한 광해군의 외교적 안목이 큰 몫을 했던 것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와 서인세력은 ‘중립 외교’ 대신에 ‘친명배금(명과 친하며 후금을 배척함)’ 정책으로 광해군 시대와는 180도 다른 강경 외교 노선을 고수했다. ‘비현실적인’ 강경 외교는 1627년의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라는 혹독한 전쟁의 상처를 안겨다 주었다.

#3. 협상은 다양한 변수와 장기적 득실 따져야

광해군은 외교 분야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광해군과 그를 지원하던 북인 정권을 무너뜨린 서인 세력에게는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시킨 패륜적인 국왕, 전통적인 국제적 신의를 저버린 파렴치한 군주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조(祖)’와 ‘종(宗)’으로 칭해지는 조선의 다른 왕들과는 달리 ‘군’이라는 왕자 시절의 호칭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의 묘도 ‘릉’이라고 칭해지는 다른 왕들의 화려한 무덤과는 달리 ‘광해군묘’로 ‘묘’라는 이름에 걸맞은 쓸쓸한 모습으로 거의 찾는 이 없이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다. 연산군이야 검증된 폭군이므로 그리 억울할 것도 없겠지만 광해군은 조금 다르다.

그가 수행했던 강력한 전란 복구정책이라든가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통하여 조선이 불바다가 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했던 놀라운 국제 감각은 오늘날에도 재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세계열강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현재에도 광해군이 보여 주었던 능동적인 실리외교의 지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겨진다.

소고기 문제를 둘러싼 협상, 추가협상, 그리고 재협상 요구 등으로 이어지는 촛불집회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국익과 국제 관계, 국민적 정서라는 다양한 변수를 가능한 한 충족할 ‘외교적 해법’을 기대해 본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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