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인과 연예인은 닮았다. 선거철일수록 공통점이 두드러진다. 인기와 흥행 없이는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서울 중구는 ‘매력적’이다. 4·9총선에서 흥행이 보장된 선거구로 손색이 없다. 한나라당 나경원(45), 자유선진당 신은경(50), 인기 연예인 뺨치는 ‘두 미녀의 대결’ 덕분이다. 여기에다 신 후보가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박성범 의원의 부인이란 사실은 흥미를 배가한다.
물론 승자가 누가 될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거다. 보수의 표밭에서 ‘두 미녀’가 각축하는 사이 통합민주당 정범구 후보가 먼저 결승점에 이를지 모를 일이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지지율과 관계없이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27일 흥행몰이의 두 주역을 동행 취재했다.
# 숨가쁜 스케줄, “밥 먹기도 힘들어요.”
한나절을 붙어다니며 역동적인 인터뷰를 기대했지만 허사였다. 카니발 승합차에 나란히 동승했음에도 좀처럼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기 어려웠다. 이동 중인 차 안에서조차 나경원 후보가 워낙 바빴다. 꼬리를 무는 휴대전화 발·수신에 질문과 답변은 끊기기 일쑤였다.
게다가 화가 난 듯했다. “왜 우리 플래카드는 대로에 보이지 않죠? 사거리 대각선엔 모두 신은경 후보 것만 있잖아요.” 화사한 웃음, 차분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오전 6시50분 첫 일정으로 지하철 신당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의 심기는 이미 편치 않았다. 5∼6분 간격으로 장소를 이동하며 2시간 가까이 출근길 시민에게 인사하는 동안 그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다. 일부 선거운동원이 나 후보가 도착하기도 전에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D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신은경 후보가 남편 박성범 의원과 나란히 선거용으로 개조한 무쏘 차량에 선 채로 손을 흔들며 떠나는 모습은 나 후보를 자극했다. “이동 중에도 인사할 수 있게 선 채로 탈 수 있는 차량을 준비하세요. 오늘 밤샘작업을 해서라도.” 나 후보는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차에 오르자마자 누군가에게 전화로 지시했다.
“정신 상태가 틀렸어. 이렇게 해서는 안돼.” 지지율 1위 후보임에도 그의 목소리는 절박감과 결기가 느껴질 정도로 단호했다. ‘우아한 공주’ 이미지는 어느새 ‘강단있는 여성정치인’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어 좀처럼 말 걸 기회를 주지 못하는 게 미안했는지 활짝 웃으며 기자에게 한마디했다. “재미없죠. 아유∼ 속 터져. 정말.” 허훈 비서관은 나 후보가 주민들에게 인사하는 사이 낮은 목소리로 “선배님(기자) 때문에 화를 많이 참고 계신 것”이라며 고마워했다.
신 후보의 유세 일정도 꽤나 숨가빴다. 그의 유세단은 본인과 남편인 박 의원, 보좌관, 유세차량 기사 4명이 전부. 당 조직의 지원을 받는 나 후보에 비하면 단출하다 못해 초라한 구성이었다. 그러나 ‘식구’가 적은 만큼 기동력에서는 한수 위였다.
꽃샘추위로 날씨가 꽤 쌀쌀했음에도 신 후보와 박 의원은 나란히 유세차량에 올라 지역 곳곳을 누볐다. 이동 중인 차량에 선 채로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손을 흔드는 신 후보의 모습은 ‘깃발 든 여전사’ 이미지였다.
기동력이 앞선다고 늘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는 법. 국립극장 앞 산책로, 장충 배드민턴장, 체력훈련장을 돈 뒤 출근 시간에 맞춰 약수역으로 이동했을 때 좋은 자리는 다른 후보 측에서 선점해 버렸다. 박 의원은 잠시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고 했지만 신 후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근 아파트단지 안으로 자꾸 들어갔다. “여보∼. 우리 빨리 가야 해.” 박 의원은 다음 장소에서도 좋은 자리를 빼앗길까봐 걱정인 모양이었다.
박 의원의 외조는 돋보였다. 이날 새벽 6시30분쯤 박 의원은 집앞에 미리 나와 유세차량과 홍보물을 직접 챙겼다. “요즘 유세는 주민을 찾아가는 것이기에 기동성이 중요합니다. 골목 골목 몇 명이 모여 있든 가는 거지요.” 오랜 기간 체득한 그만의 노하우인 듯했다. “저는 신은경 남편입니다. 아내가 저보다 일을 더 잘할 겁니다.” 박 의원은 유세 현장에서 주저없이 자신을 ‘신은경 남편’으로 소개했다.
“한 지인에게 ‘내가 아니었다면 자기 분야에서 성공했을 아내가 나를 10여년간 도왔으니 이제 내가 아내를 도와줄 차례’라고 말했답니다.” 신 후보는 남편의 외조에 대한 소감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나 후보는 남편의 외조를 받는 신 후보가 부러울 법하다. “제 남편도 외조해요. 일주일에 이틀 정도 올라와서 아이들을 봐주죠.” 나 후보의 남편은 김재호 서산지원장이다.
숨가쁜 일정은 규칙적이고 편안한 식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 후보는 아침식사는 늘 거른 채 집을 나선다고 했다. 차에 오르자 대신 호박이 섞인 떡을 집어들고 기자에게도 권했다. 오전 9시40분쯤 짬이 나 감자탕 집에 들어섰지만 계속 걸려오는 전화로 나 후보는 몇 숟가락 뜨다 말았다. “2분 뒤 일어나야 합니다!” 나 후보의 예고에 일행도 밥 반 그릇은 남긴 채 식사를 중단해야 했다.
신 후보도 끼니를 거르는 건 다반사인 듯했다. 이날 낮 12시50분쯤 오전 일정을 마무리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보좌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충무초등학교에서 학부모총회가 열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세팀은 급하게 차를 돌려 학교로 향했다. 학부모들은 여간해서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점심을 거르더라도 만나러 가야 한다고 했다. 결국 이날 점심은 차 안에서 김밥으로 때웠다.
#“‘미모 대결’이 아닙니다.”
“TV에서 보던 것보다 더 이쁘네.” 주민들을 만나면서 나 후보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그러나 나 후보는 ‘미모 대결’ 식의 표현에 질색했다. “두 미녀의 대결…”이라며 말문을 열자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며 손사래쳤다. “제발 그런 식의 접근, 표현을 삼가 달라”고 부탁했다. 언젠가 ‘국민누나’라는 별명이 세간에 회자되자 “정말 속상하다”고 말한 적도 있다.
여성으로서, 정치인으로서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닐 테지만 그런 편향된 시각에서 정치인으로서의 장점이 가려질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래서인지 나 후보는 주민들에게 인사할 때 “능력 있는 후보”라고 강조했다. 주민이 “아이구 이쁘네”라며 손을 잡으면 “능력도 있어요”, “일도 잘해요”라고 응수했다.
신 후보는 나 의원과의 대결 구도에 특히나 신경을 쓰는 듯했지만 겉으로는 잘 표현하지 않았다. “나 머시기도 있던데…”, “무조건 신은경만 알면 돼요.” 광희문 앞 태안 자원봉사자 버스에 올라 인사하던 중 나 후보 이름을 떠올리려는 한 아주머니의 입을 본인의 이름을 강조하며 막아버렸다.
“나 의원(후보)요? 훌륭한 분이죠. 그렇지만 이길 자신 있어요. 12년간 늘 함께해왔던 얘기라 다들 잘 아시고, 주민들이 원하는 것을 저 또한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나 후보도 “신 후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좋은 후보죠”라고 했고, “자신 있느냐”는 물음엔 지체없이 “네”라고 답했다. 그는 “중구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때와 비교해 많이 발전하지 못했고 주민들이 떠나가 안타깝다”며 “주민들이 다시 돌아오는 중구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주민들 반응
“열심히 하세요. 내가 더 열받더라구요.” 남산 국립극장 앞에서 만난 한 주민은 신 후보 부부를 보자 먼저 악수를 청했다. “한나라당이 중구에 낙하산공천 해서 주민들이 자존심 상해한다는 거예요.” 박 의원이 기자에게 다가와 부연설명했다.
신 후보는 이곳 주민들에게 국회의원 후보라기보단 이웃에 가까웠다. 남산 체력단련장에서 주민들은 신 후보에게 저마다 한마디씩 건넸다. “어젯밤 TV에 나오던데? 우리 와이프도 진명(여고) 출신이야”, “이제는 목욕탕 봉사 못하겠네. 힘내세요.”
서울중앙시장 유세장에서 상인 정득실(여·60)씨는 신 후보 예찬론을 폈다. “동네에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꼭 찾아왔어. 박 의원보다 더 잘했지.”
한나라당 공천에 대한 성토도 나왔다. “박 의원이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봉사해 왔는데 한나라당이 너무 오만해졌어. 누구 말마따나 버르장머리 고쳐나야겠어.”
그러나 비판도 없지 않았다. 나 후보가 신당동의 한 약국에 들어서자 60대 약사는 “박성범 의원 평판이 좋지 않다”며 “꼭 이기라”고 말했다. 그는 그 이유로 2006년 지방선거에서 공천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아 일부 유죄 판결을 받은 사실을 지적했다. 신 후보는 이에 대해 “당시 당 경쟁세력의 음모였다. 물건을 당에 돌려줬는데 시간이 많이 경과돼 오해를 받은 것”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대중적 인기에서야 나 후보가 뒤지지 않는다. 그가 가는 곳이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었고, 멀찍이서 일부러 악수를 청하러 오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적잖았다.
“어쩌면 이렇게 이뻐”, “잘 될 거야” …. 덕담 뒤엔 기대와 충고가 이어졌다. “서민들 잘살게 해줘야지”, “절대로 변하지 마세요.” 장충단공원을 찾아 서노련(서울지역노점상연합회) 부녀회원들에게 “서민들에게 힘이 되겠다”며 인사하자 박수와 함께 여기저기서 충고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서노련 부녀회는 이곳에서 한 달에 한번 무료급식 봉사활동을 한다.
이어 나 후보는 장충경로당에서 큰절을 하고는 할머니 20여명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인사했다. 경로당을 나서며 나 후보는 “할머니들이 한분 한분 인사드릴 때 ‘꼭 될 거야. 걱정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시더라”며 좋아했다.
더러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실망감을 여과 없이 나 후보에게 쏟아내는 이도 있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나 하고, 부동산 투기한 사람들 장관이나 앉히고…” 장충단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60대 남성은 나 후보가 다가가 낭랑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나경원입니다” 하며 악수를 청하자 손을 뿌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치가 꿈은 아니었어요”
신 후보와 나 후보에겐 공통점이 적잖다. 우선 빼어난 미모만큼이나 경력도 화려하다. 신 후보는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여성 앵커 출신이며 방송계를 떠난 뒤 대학교수, 회사 CEO(최고경영자)를 지냈다. 나 후보는 판사 출신으로, 한나라당 대변인으로 명성과 인기를 얻었다. 똑 떨어지는 발음, 안정감 있는 논평으로 앵커를 맡아도 손색이 없다는 평을 듣는다.
두 사람 모두 “원래 정치할 생각은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같다. 신 후보는 최근 왜 정치를 하냐는 질문을 제일 많이 받는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답변이 재미있다. 정치에는 생각이 없었고 남편의 일을 거들었을 뿐인데 지나고 보니 그것이 바로 정치였다는 것이다.
남편의 한나라당 공천 탈락도 이유 중 하나임을 감추지 않았다. “심각하게 결정했어요. 지난 12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 정치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이곳에 필요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죠. 이것이 저한테는 가장 중요한 자산입니다.”
박 의원은 외조를 자청했다. “아내가 스스로 결정한 거죠. 저는 그러라고 했습니다. 도와주겠다고요. 정치 신인이지만 정치 속성을 잘 알고 있어 잘 해낼 것이라 믿어요.”
신 후보는 KBS 앵커 시절 같이 뉴스를 진행하던 18세 연상인 박 의원과 결혼했다. 15대 총선에서 남편이 당시 중구의 ‘맹주’였던 정대철 전 의원을 꺾을 때 그의 ‘목욕탕 때밀이’ 유세는 정가의 화제였다.
나 후보는 ‘여유 있고 편안한 삶’을 정치의 ‘기회비용’으로 설명했다. 정치에 뛰어들면서 일상에서 편안함은 사라졌고 아이들의 희생도 불가피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정치에 뛰어들게 된 것은 장애인인 딸 때문이었다. 오래전 그는 장애인을 외면하는 교육 현실이 자신을 정치로 이끌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날 나 후보는 “왜 정치를 하느냐”는 질문에 “다 알면서 새삼스럽게 묻느냐”며 답변을 피했다. “기억력이 감퇴해 가물가물하다”고 하자 “정치를 통해 잘못된 제도, 시스템을 바꾸고 싶었다”고 말했다.
몇년 전 국회의원을 지낸 한 법조인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인들은 왜 금배지를 못 달아 안달일까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그 맛에 취하면 이성을 잃는다”고 답했다. 그래서 자꾸 죽을 운명도 모른 채 불나방처럼 달려들게 된다고.
나 후보는 “그런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라며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치란 사명감 없이는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나 후보가 제시하는 ‘유혹을 이겨내고 정치하는 비법’이다.
류순열·신정훈 기자, 사진=허정호 기자 ryoo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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