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섣부를 지 모르는 다음 노선에 대해 “더 ‘확’, 아니 ‘팍’ 풀어진 배역에도 도전의 욕망을 느껴요”라며 생글생글 웃는 그는 분명 온몸에서부터 예전보다 한결 탱탱해진 자신감과 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같은 모습은 내년이면 만으로도 삼십줄에 접어드는 그가 지금보다 더 화려할 서른잔치의 전주곡을 울리고 있다는 예감도 선사했다.
‘똥개’, ‘주홍글씨’, ‘극장전’, ‘가을로’ 등 굵직한 화제작에 연달아 출연하며 영화계에 안착한 엄지원은 콧소리가 적당히 들어간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사랑의 아련함과 지독함을 자극해왔고, 신세대 감성 보다는 불변의 기본 정서를 대변해왔다.
그런데 ‘스카우트’는 좀 다른 모양이다. 이번 영화에서 엄지원은 선동열 잡기 작전에 고군분투하는 스카우터 ‘호창’(임창정)의 대학시절 첫사랑으로 이소룡이 사망하던 날 갑자기 이별을 선언하고는 종적을 감춘 뒤 7년만에 호창과 재회하는 여주인공 ‘세영’ 역을 연기했다. 엄지원의 설명에 따르면 세영은 청순한 첫사랑에 대한 남자 감독들의 전형적인 ‘로망’도 대변하면서 엉뚱함과 적극성도 갖춘 인물. 언제라도 툭 치면 탁 눈물을 떨굴 것 같던 엄지원이 양지의 세상에서 경쾌하게 뛰어놀며 새로운 얼굴의 일단을 보여주는 배역이다.
광주를 배경으로 다룬 이 영화에서 엄지원은 스스로도 ‘참 잘했어요’라고 도장을 쾅 찍어줄 만큼 능숙한 사투리 연기도 펼쳤다. 대구 출신으로 경상도사투리가 표준어 보다 더 익숙한 그는 ‘전라도 사투리로 연기하는 게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 이 영화에 끌렸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 러닝타임 등 완성본을 미리 상상해보는 버릇이 있는데 1시간30분 남짓의 시간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똑 떨어지는 영화로 탄생할 것 같다는 추측도 선택의 한 이유가 됐다.
“감독님이 정말 그런 단순한 이유에서 캐스팅 제의에 응했느냐고 놀리기도 했죠. 제 딴에는 진심이었는데 말이죠. 원래 영화를 택할 때 제 배역이 얼마나 멋질까, 얼마나 돋보일까 보다는 전체를 보는 편이기도 하고요. 좋은 영화가 있어야 배우도 산다는 주의거든요. ”
그같은 흔쾌한 기분이 있어서인지 촬영장에서도 감정의 밑바닥을 박박 긁어 드러내야 하는 전작 때 같은 압박감이 아니라 즐거운 각성을 듬뿍 느꼈다. 게다가 그는 ‘스카우트’의 공식 ‘공주마마’였다. 극중 호창 뿐 아니라 조폭 출신 ‘곤태’(박철민)의 순애보 대상으로 남성들의 겹사랑을 받는 배역대로 감독, 배우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광식이 동생 광태’를 연출한 김현석 감독은 엄지원의 신인시절 아침드라마까지 다 본 팬이라며 엄지원을 끔찍이 아꼈고, 상대역인 임창정은 ‘엄공주’라는 공식 호칭을 선사해 금지옥엽처럼 그를 대했다.
엄지원은 이에 대해 “솔직히 기분 좋았죠. 다들 귀여웠고요”라고 장난스럽게 깜찍한 공주병도 발동한 뒤 “김현석 감독, 야구계의 지인인 양준혁 선수 등 모두들 노총각인데 언제들 장가를 갈런지, 참 내…”라며 엄마같은 관심도 드러냈다.
만만치않은 결혼 적령기를 지나고 있는 엄지원은 주변 노총각들을 걱정만 할 상황은 아니다. 그는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느냐고 물으면, 사실은 2년전인데 1년전이라고 줄여 말하고 싶어질 정도로 좀 시간이 지났지만, 어서 결혼하고 싶다와 같은 절실한 마음은 들지 않네요. 원래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성격이고요. 나이 들어 혼자여도 멋진 쪽은 남자 보다 여자인 것 같아요”라고 재치있게 남자친구 유무와 관련한 사적인 질문을 피해갔다.
현재 엄지원의 심장을 더 두근두근 뛰게 만드는 상상은 결혼해서 예쁜 가정을 꾸리는 그림 보다는 올해 칸 국제영화제를 호령한 전도연처럼 국제 무대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모습이다.
“새로운 소속사를 결정하면서 점성술가한테 상담을 청한 적이 있는데요. 그분 말 중에 가슴에 확 스며든 대목이 있었어요.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래의 제 모습이 보인다는 거에요. 그 말을 100% 믿고 말고를 떠나 왠지 가슴 한켠이 뿌듯해지더라고요. 오늘 보다 내일이, 내일 보다 모레가 더 기대되기도 하고요.”
인생의 앞을 두려워하지 않는 엄지원은 누구라도 그 매력을 ‘스카우트’하고 싶을 만큼 단단했다.
글 조재원, 사진 전경우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