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아는 도쿄의 명소가 아닌 이색적인 곳들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일본인 친구가 있었다. 덕분에 나는 그의 가이드를 받으며 숨겨진‘진짜 일본’을 만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물론 그가 데려간 곳들 중에는 우리나라 책에 소개 된 유명한 곳들도 상당수였지만…. (그럴 때면 나는 한국인의 정보수집 능력에 감탄을 하곤 했다)
오차노미즈(御茶ノ水) 역시 일본인 친구가 소개해준 곳이다. (도쿄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오차노미즈는 익히 유명한 장소지만, 의외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적다) 도쿄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차노미즈는 JR선이나 도쿄 메트로 마루노우치선의 ‘오차노미즈 역’에서 내리면 된다. 일본의 제일 큰 전자상가 지역인 아키하바라에서는 걸어서도 충분히 갈 만 하다.
오차노미즈 역(驛)은 정말 간소하다. 마치 오차노미즈 일대의 분위기를 하나로 표현해 놓은 것 같이 소박하고 정갈한 역사(驛舍)였다. 나는 주말에 종종 오차노미즈를 찾곤 했는데, 주말엔 평일보다 더 조용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는다는 단점도 있다. 때문에 나는 오차노미즈 역 근처 상가에서 점심 식사를 때우곤 했다.
오차노미즈 역 상가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당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나는 레스토랑 コ―ヅ―コ―ナ―(카-자-카-나-)을 좋아한다. 저렴한 가격에 비해 음식의 양과 질이 너무 뛰어나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이다.
특히 이 집 스파게티는 20여가지가 넘는 다채로운 종류의 스파게티를 만날 수 있는데, 일본풍 명란 스파게티와 브로콜리 크림스파게티를 추천한다. 무엇보다 브로콜리 크림스파게티는 브로콜리를 갈아 크림소스로 간을 하고 생토마토와 해산물을 얹어 만들어 전혀 느끼하지 않고 그 맛이 일품이다. 주말이면 종종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자녀 등의 대규모 가족 단위 손님들이 몰려와 푸짐하게 외식을 즐기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예스러운 오차노미즈 골목 사이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니코라이 당이다. 멀리서도 바로 눈에 띌 만큼 니코라이 당은 오차노미즈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낯선 건축 양식이다. 정식 명칭은 일본 하리스토스 정교회 및 도쿄 부활 대성당 교회.
1861년에 당시 전도를 위해 러시아에서 온 니코라이 대주교가 건립한 비잔틴양식의 건물이며 일본의 중요문화재이기도 하다. 오차노미즈 일대에선 중국식 건축물이 특징인 ‘유시마성당’, 서기 730년에 창건된 오래된 ‘간다묘진’과 함께 주요 종교 건축물로 유명하다.
오차노미즈 주변을 걷다 보면 정말 많은 대학을 지나치게 된다. 이 지역엔 메이지 대학을 비롯해 니혼 대학, 쥰텐도 대학, 도요가쿠엔 대학, 도쿄덴키 대학, 교리츠 여자대학 등이 있으니 조금만 걸으면 일본의 대학들을 마주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오차노미즈 일대에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일본대병원과 교운도병원, 산락병원 등이 있고, 재수생 학원들까지 골목골목 즐비해 있어 오랫동안 학문이 펼쳐지던 역사적인 장소임을 실감케 한다.
메이지 대학을 따라 언덕을 내려오다보면 오른쪽으로 악기 상점가가 보인다. 좀 더 정확한 위치를 말하자면, 오차노미즈 역 서쪽 출구에서 야스쿠니 거리로 향하는 메이다이 거리에 다수의 악기점이 있다. 여기에선 악기뿐 아니라 악보, CD, 음악관련서적 등 풍부한 자료가 있어서 일본어에 대한 제약만 느끼지 않는다면 초보에서부터 프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얻어갈 수 있다.
악기상점가를 구경하며 언덕을 다 내려오면 큰 사거리가 있다. 여기가 바로 오차노미즈의 상징, 간다(神田) 헌책방가이다. 메이지 시대 이후 이곳엔 많은 학교가 설립되며 오늘날에도 1,000만권이나 되는 재고량의 160개 헌책방이 산재해있다고 한다. 큰 길을 따라가며 고서점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나이든 중년의 어르신에서부터 젊은 대학생들까지 오래된 책 더미 사이로 진귀한 책 한 권을 손에 쥐기 위해 쭈그리고 앉아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간다 헌책방에선 가끔 고고학자들도 깜짝 놀랄 만한 오래된 책이 발견될 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관련된 역사적 사진집 혹은 문헌집이 종종 눈에 띄니 간다 헌책방가에서 혼자 2~3시간 정도를 때우는 건 식은 죽 먹기일 듯.
여행을 하다 보면 짧은 일정 중에도 몸이 지쳐 좀 쉬고 싶을 때가 있다. 많은 걸 보겠다는 욕심 때문에 속도 조절을 잘 못했기 때문일 터. 그럴 때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이 고즈넉한 장소가 그리워진다. 만약 무언가를 봐야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그냥 낯선 곳을 걸으며 여유를 부리고 싶다면, 도쿄의 오차노미즈(御茶ノ水) 를 꼭 추천하고 싶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출발한 당신에게 오히려 더 큰 무언가를 선물해줄 수 있는 곳이니 말이다.
_ 강한나 (현, 일본 글로벌웨더자키 / 프리랜서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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