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중 남과 북에서 동시 서훈한 인물은 흔치 않다. 그 중 한 명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고 유자명(1894∼1985) 선생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그의 아들 유전휘(柳展輝·65)씨를 지난달 24일 후난성 창사(長沙)시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중국 후난(湖南)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를 지낸 유씨는 퇴직한 뒤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에 심취해 있다. 유씨는 “나이가 들수록 조국 광복을 위해 젊음을 바친 아버지의 심정이 가슴에 와닿는다”며 “선친을 떠올릴 때마다 창사에 있는 독립유적지 고증과 복원에 많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다”고 밝혔다.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유자명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발각되자 그해 6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1922년 항일 무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고, 1938년 조선의용대의 지도위원, 1942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재선임됐으나 광복 후 귀국하지 못하고 창사의 후난농업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유씨는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인 사실을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유씨는 “상하이 시절 일본의 감시를 교란하기 위해 8명이 코트 한 벌을 번갈아 입었던 것과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에서 체포됐을 때를 설명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망명 후 한 번도 고향을 찾지 못한 유 선생은 자식들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자주 털어놨다고 한다. 유씨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배운 아리랑, 도라지 등을 자주 부르셨다”며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 고향 얘기는 되도록 피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유씨는 “벼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아버지는 항상 바쁘셨고, 저도 대학 교수여서 서로 얼굴을 거의 못 봤다”며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는다”며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2002년 아버지의 유해를 고향에 모시려고 고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유씨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뿌듯했다고 한다. “고향의 친지들이 따뜻하게 맞아줬고, 든든한 조국과 고향이 생겼다는 생각에 흥분됐다”며 “앞으로 중국 내 항일유적지 복원에 매진하고 죽으면 아버지의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도 털어놨다.
창사=장원주 기자 stru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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