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은 ‘깨친 분’의 깨침에 대한 말씀이 녹아 있는 경전인데, 국내 50권이 넘는 해설서들이 대부분 비틀린 채로 전해지고 있고, 심지어 내용도 모른 채 열심히 베끼고 외우면 복받는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웠습니다.”
‘금강경’의 원제목은 ‘금강반야바라밀경’.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요?”라는 제자 수보리의 물음에 대한 붓다의 답변을 기록한 내용으로, 한국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도 하다. 전씨는 해인사 팔만대장경판본 ‘금강반야바라밀’(구마라 집 한역)을 원본으로 삼아 우리말로 번역했는데, 제목 풀이부터 바로잡고 잘못 끼워넣은 부분을 빼내는 등 붓다가 금강경을 설한 지 2500여년 만에 실로 ‘혁명’적인 작업을 해냈다. 찬찬히 음미한다면 누구라도 석가모니의 원래 말씀이 훨씬 친근하게 느껴질 법하다. 과거 PD를 하면서 쌓은 ‘의심하기’가 이 책의 동력이 됐다. 기존 해설서들이 모두 금강경을 ‘번뇌를 없애고 피안에 이르게 하는 경’이라고 풀이한 데 비해, 그는 “수십년 동안 반야 공부로 무장한 제자들에게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반야바라밀(지혜를 쌓아 해탈의 세계로 건너가다)의 집착마저도 벼락(금강)으로 잘라버리라’는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이 금강경”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양 무제의 아들 소명태자가 금강경을 32절로 분절해 놓은 것과 관련해 “금강경은 수천 년 전승된 인도 사람의 노래”라며 “죽 이어지는 노래를 나누는 것은 부질없는 노력”이라고 지적했다. 더욱이 소명태자는 분절 과정에서 붓다의 말과 ‘유통분(편찬자들이 추가한 부분)’도 분별하지 못한 ‘글 바보’였다는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전씨는 금강경 해설서들이 잘못 전하고 있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희유(稀有)’ ‘여래(如來)’ 등 많은 부분의 해석을 바로잡았고, 인도 사람 구마라 집이 엮은 한역본에서도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유통분 10여개를 솎아냈다. 불교계의 논란이 예상되나 그는 얼마든지 논쟁할 생각이다. 우리말 금강경 제목을 ‘비(非)’라고 정한 것도 붓다의 말처럼 ‘그게 아니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금강경의 가르침은 지극히 명료합니다. 우리가 ‘자기(我)’라고 굳게 믿고 있는 ‘자기(ego)’가 ‘실제 자기가 아님(非我)’을 깨달음으로써 본래의 ‘자기(self)’를 찾으라는 깨침의 가르침입니다. 매일 평상심으로 좋은 생각과 깨달음을 가지면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45년 동안 제자들에게 일러주었던 것입니다.”
그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펴낸 우리말 금강경은 실제 총 382쪽 분량에서 18쪽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금강경을 고치고 솎아내고 바로잡는 과정을 중학생 수준이면 이해할 정도로 쉽게 서술하고 있다. 전개 방식이 탄탄하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박진감 넘친다. 이 과정에서 우리말 사랑과 불교경전, 번역 등에 관한 주변 지식이 풍부하게 등장해 지적 즐거움과 통쾌함을 맛볼 수 있다. 에필로그에서는 집필에 도움을 준 스승 중광 스님, 제2의 붓다 크리슈나무르티, ‘아함경 이야기’를 쓴 마쓰야 후미오 등을 소개하면서 붓다의 ‘팔고(八苦)’ 중에서 여덟 번째인 ‘오온성고(五蘊盛苦)’를 ‘버리려 해도 버리지 못하는 괴로움’으로 풀이하는 솜씨를 발휘한다. 그동안 누구도 명쾌하게 번역하지 못한 오온성고에 대한 해석으로, 7번째 고(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와 멋진 대구를 이룬다.
“붓다의 가르침은 괴로움에서 출발합니다. 괴로움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것을 이기는 길을 찾을 수 없지요. 오온성고는 우리가 노력만 하면 그래도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는 괴로움이기에 붓다의 가르침이 소중한 것이고, 여기에 불교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금강경이 불자만의 것이었을까. 불교라는 이름도 없던 그 시절, 가장 높은 깨달음을 얻었던 인류의 큰 스승이 인류 모두를 깨침의 길로 안내한 길 안내서는 아니었을까. 붓다는 깨침 이후에도 평소 그대로 비구(인도어로 거지)로 살다 갔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hul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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