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엔 영국인인지 홍콩인인지 고민했다. 지금은 중국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홍콩인으로서 자부심을 갖는다. 홍콩은 중국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애니 웡·王翠虹·여·아메리칸익스프레스 근무)
“한국어 수강생에게 물으면 요즘은 거의 중국인이라고 말한다. 예전에 비해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조애리·여·홍콩중문대 한국어 강사)
홍콩 사회에서는 요즘 정체성 문제가 화두다. ‘홍콩인(Hongkonger)인가 중국인(Chinese)인가’ 하는 자기 질문과 답변 속에는 홍콩 반환 후 10년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시각이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십인십색 평가는 현재 홍콩인들이 겪는 심리적 혼란을 말해준다.
최근 홍콩대학은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스스로 홍콩인이라고 인식하는 청소년의 비율이 반환 직전인 1996년 33.9%에서 10년 만인 지난해엔 28.7%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결과를 놓고 홍콩 내외 언론은 홍콩 청소년들이 이제 스스로 중국인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특히 중국 언론은 이를 홍콩의 중국화 성공 사례로 새삼 강조했다. 과연 그럴까?
조사 결과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홍콩 청소년이 겪는 정체성 혼란을 엿볼 수 있다. 홍콩인이라고 생각하는 비율도 줄었지만 중국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응답도 10.4%에서 9.6%로 감소했다. 이에 비해 자신이 ‘홍콩-중국인’이나 ‘중국-홍콩인’으로 생각한다는 비율은 55.8%에서 51.7%로 줄긴 했지만 여전히 절반을 넘었다.
조사 결과에서 중국 출신을 제외하고 홍콩 토박이만 보면 정체성 혼란은 더 심했다. 토박이 청소년 중 스스로 홍콩인이나 중국인이라고 정체성을 밝힌 비율은 줄었다. 반면 홍콩-중국인, 중국-홍콩인이라고 답한 비율은 55.2%에서 60.5%로 크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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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여년간의 영국 통치를 통해 서구식 자유주의 사고와 생활습관이 뿌리박혔던 홍콩이 중국의 품에 안기면서 겪는 정서적 지체현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식민지시대에도 ‘나는 영국인인가 중국인인가’ 하는 정체성 혼란으로 ‘홍콩인은 시적(市籍)은 있지만 국적(國籍)은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통용됐다. 이 같은 식민지시대의 고민이 반환 후에도 새로운 차원에서 계속되는 것이다.
중국과 홍콩 당국은 그동안 대륙 본토와 홍콩인의 일체감을 강화하는 중국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 왔다. 이미 반환 직전인 1996년 홍콩 당국은 ‘학교공민교육지침’을 개정해 교육 내용에서 조국, 민족긍지, 애국주의, 민족주의를 대폭 강화했다. 2003년엔 중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 승무원 양리웨이(楊利偉)가 홍콩을 방문해 우주복을 입은 채 홍콩이 낳은 세계적인 스타 청룽(成龍)과 함께 대중 앞에서 노래하며 중국과 홍콩의 일체감을 고무시키려 했다.
◇홍콩의 번화가인 센트럴의 지하철역 부근에서 홍콩 시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홍콩=김청중 특파원 |
하지만 당국의 중국화 교육에도 과반수 홍콩 청소년이 모호한 정체성을 지닌 것이 홍콩의 현실이다. 1997년 7월1일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넘어간 뒤 홍콩 곳곳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五星紅旗)가 휘날리지만 홍콩과 중국이 마음마저 하나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음을 보여준다.
홍콩시티대 중문·번역·언어학과 김원경 교수(여)는 “홍콩 학생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한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아서인지 우수한 학생들도 왠지 붕 떠 있는 느낌이 든다”며 “홍콩에서 새삼 국민적·민족적 정체성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정체성 혼란에는 홍콩인이 경제·문화·교육 면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선진 시민이라는 자부심도 한몫한다. 민주주의, 인권 문제 등에서 어두운 측면이 있는 중국과 동일시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작지 않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영국 식민통치의 결과로 서구식 생활 원리가 지배하는 홍콩을 서구의 일부로 바라보는 중국과, 거꾸로 아시아의 일부로 바라보는 서구인의 이중적인 시각도 홍콩인의 정체성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홍콩민정사무국 패트릭 호(何志平) 국장은 “홍콩과 중국이 갈라져 산 세월이 150년”이라며 “홍콩인이 중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하룻밤에 가질 수는 없다”고 말했다.
홍콩=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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