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 해제를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등장인물들이 생소하다. 이걸 어쩌나. 하지만 드디어 반가운 인물, 하버마스가 등장했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그 지향점을 발견한다는 하버마스와, 사회를 계몽할 수는 없다는 루만의 입장 중 하버마스는 우리나라 80, 90년대 시대상황과 맞아떨어진 이론이었다.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니클라스 루만의 이론은 우리나라와 시대적 인연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일단 이런 대립점들에서 루만의 이론에 다가가기 시작하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역자, 편집자를 애정관계에 비유하자면, 역자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 편집자는 그 사랑을 감시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을 하면 눈에 콩깍지가 씌는 법! 역자가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잘못 번역된 부분을 찾아내 정확한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편집자의 일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너무 길어 문장을 끊어야만 하는 부분 등 애정 감시자의 끊임없는 요구에 역자 박여성 님은 성실함과 꼼꼼함으로 책에 대한 사랑을 다져나갔다. 역자의 ‘사회체계이론’에 대한 진실한 애정으로 작업이 진행될수록 이 책은 더욱더 생명력을 얻었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이 술술 풀리기
니클라스 루만 지음/박여성 옮김 /한길사/4만7000원 |
위해선 같이하는 사람과의 호흡이 가장 중요하다. 산을 오르다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정상이 어디예요?” 하고 물으면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한다. “바로 저 앞이에요. 힘내세요.” 그 말을 믿고 가보면 어느새 갈 수 없다고 생각한 정상에 와 있다. 자기생산과정, 연산작동방식, 재귀준거 등 생소한 개념어들과 난해한 내용으로 숨을 헐떡이곤 했지만 역자와의 활기 넘치는 피드백 과정과 격려에 큰 힘을 얻었다. 그 힘은 내용의 난해함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독서를 전후해 자신이 겪는 변화에 주목하라”는 베커의 말은 한국어판의 최초 독자인 나를 향한 것이었다. 가볍게 생각했던 커뮤니케이션의 의미가 묵직하게 다가왔고, 뜻밖에 예술, 문학에 도입된 루만의 이론에서는 루만 이론의 역동성이 느껴졌다. 그간 드문드문 이야기되던 루만의 이론을 깃털이라고 한다면 ‘사회체계이론’은 루만 이론의 우람한 몸통이다. 그 몸통이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배경진 한길사 편집실장
사회체계이론 1·2 / 니클라스 루만 지음/박여성 옮김 /한길사/4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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