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퇴계 이황 등 대학자에서부터 이름 없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우리 선조들이 남긴 ‘정신문화’의 정수들이 한글 번역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해제 작업조차 되지 않아 역사적, 학술적 자료로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27일 세계일보 취재팀이 고문헌을 많이 소장한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 규장각 등 41개 학술기관과 대학을 조사한 결과 이들 기관이 보유한 총 226만여점(개인·사찰 소장 문헌 등 포함 시 총 340여만점 추산)의 고문헌 중 국역(國譯)된 것은 0.04%인 1000권 정도에 그치고 있다. 책의 저자·내용·구성·간행일 등의 대략적 설명을 담은 해제 작업이 끝난 것은 4.4%인 10만여점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선시대 국정 전반을 상세히 기록한 ‘승정원일기’는 사료적 가치가 뛰어난데도 지금껏 일부만 국역됐고, 왕실과 국가의 주요 행사 내용을 기록한 각종 ‘의궤’와 조선시대 왕실 족보 등을 담은 ‘이왕직’ 자료 등도 아직 한글화되지 못한 상태다.
대학이 소장한 고문헌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 고려대는 ‘삼국유사’ ‘악학궤범’ 등 고문헌 10만여점을 갖고 있지만 국역은 물론 해제 작업조차 마무리짓지 못하고 있다. 보물급인 퇴계의 ‘동국명현사적’ 친필본이나 세종대왕 때 편찬된 ‘역대병요’ 등은 수장고에 있다가 전시회 때만 잠시 햇빛을 볼 뿐이다. 1000점이 넘는 초서체 문헌은 아예 해독 전문가가 없어 손도 못 대고 있다.
연세대도 10만점의 소장 고문헌 중 기본적인 해제 작업을 마친 것은 6%인 6000여점에 머물고 있다. ‘응제시주’ 등 7만점을 소장한 성균관대와 조선시대 음악가 박연의 ‘난계유고’ 등 1만8000여점을 보유한 이화여대도 최근 해제 작업에 착수한 정도다.
이렇게 된 데는 대학과 기관들이 무관심한 탓도 있지만 정부의 오락가락한 정책도 한몫했다는 지적이다.
교육부는 2004년 대학 고문헌을 데이터베이스(DB)화하는 ‘역사자료정보화사업 5개년 계획’을 발표해놓고 시행 3년 만인 올해 예산 부족을 이유로 중단했다. 정통부도 1999년부터 해오던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고문헌 DB 포함)의 예산을 올해 40%가량 줄였다.
서울대 송기중 교수(국문학)는 “고문헌 활용이 중요하다고 모두가 말하면서도 정작 행동에는 나서지 않는 것이 문제”라며 “지적·문화적 자산이 사장되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부 기동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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