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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32>교토 ''헤이안 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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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4-04 12:23:00 수정 : 2007-04-04 12: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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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인 간무천황 사당엔 ''한국산 벚꽃'' 만발 일본 교토의 ‘헤이안신궁’에는 요즘 벚꽃이 한창이다. 헤이안신궁은 지금의 아키히토 일왕의 직계 조상 제50대 간무(桓武)천황(781∼806 재위)의 사당이다. 4월 중순이 되면 ‘헤이안경’(교토)의 고대 궁전(시신전)을 상징하는 유명한 벚꽃 ‘시다레 사쿠라’(꽃가지가 축 늘어지는 벚꽃)도 자색을 활짝 드러낸다. 헤이안경은 아키히토 일왕이 “가장 숭배하는 조상의 터전”(1994년 11월8일)이라고 말한 곳이다. 아키히토 일왕이 “내 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며 일본 천황가는 백제 계열이라고 기자회견 석상(2001년 12월23일)에서 밝힌 지도 벌써 6년이 지났다.
일찍부터 한일 두 나라가 한 핏줄이라는 것을 밝힌 일본 사학자는 여럿이다. 한국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일 양국은 동종(同種)이라는 책들을 불태운 분서(焚書) 사건도 간무천황 시대에 있었다. 그 옛기록은 ‘신황정통기’(14세기 중엽)에 들어 있다.
간무천황이라는 백제인 왜왕은 누구인가. 아키히토 일왕이 밝혔듯 백제 무녕왕의 후손인 화신립 황태후의 몸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아버지도 백제인인 제49대 왜왕 고닌천황(770∼781 재위)이라는 것을 필자는 고서(‘대초자’ 1158) 발굴로써 확인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간무천황은 한일 동족에 관한 역사 기록들을 불태웠을까. 지금껏 일본 사학자들은 언급조차 한 일이 없지만, 여기에는 일본 선주민들의 ‘백제인 왕실’에 대한 저항을 제압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고 본다.
먼저 벚꽃의 발자취부터 살펴보자. ‘벚꽃’ 하면 흔히 ‘일본 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일본이 나라꽃으로 삼은 으뜸가는 품종은 그 원산지가 한국이다. 현재 일본이 세계에 자랑삼는 벚꽃 품종은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 일본 식물학자들은 이 ‘소메이요시노’ 품종이 에도(江戶, 1603∼1867)시대 말기 나라땅의 요시노산(吉野山)에서 등장하였다고 주장했다. 즉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에서 자생했다는 것이다.
◇요시노산의 유서 깊은 사쿠라 명소 ‘금봉산사’의 고대 한국식 산문 ‘흑문’(구로몬)으로 벚꽃 구경을 오는 일본 상춘객들.

그러나 1933년 일본의 저명한 식물학자 고이즈미 겐이치(小泉源一)는 ‘일본 사쿠라의 한국 기원’론을 발표해 화제가 됐다. 또한 오늘날 권위 있는 벚꽃 전문 학자인 다카기 기요코(高木きよこ) 교수는 “한국에는 사쿠라가 매우 많다. 소메이요시노 사쿠라의 원산지는 제주도”(‘櫻’ 중앙공론사, 1992)라고 못박았다. 다카기 교수는 일본의 벚꽃 전문가들의 대표적 연구모임인 ‘일본사쿠라회(日本櫻會)’의 회원이다.
1908년 프랑스인 타퀘 신부는 한라산에서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 한 그루를 발견했다. 그 후 독일의 식물학자 퀘흐네 교수도 제주도로 건너와 1912년 한라산 관음사 위쪽에서 왕벚나무를 확인하고 학명(Prunusyedoenisis)도 처음 지어 유럽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했다.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 일본이 그 사실을 알자 곧 왕벚나무 종자를 채집해 가져가기 시작한 것이 소메이요시노의 기원이다. 1996년 제주대 김문흥 교수 등의 공동 연구 조사로 5그루의 왕벚나무가 다시금 한라산 관음사 부근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일본 학자들은 여전히 요시노산이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의 자생지라고 주장하는 실정이다. 이를테면 가쿠 도시카즈(賀來壽一)는 자신의 저서 ‘사쿠라’에서 “요시노산은 천하의 으뜸가는 벚나무의 명소다. 에도(江戶, 도쿄의 옛 지명)의 고가네이(小金井) 강둑, 아스카산, 스미다강(도쿄의 큰 강) 강둑 등은 모두 요시노산으로부터 옮겨다 심은 벚꽃의 명소들”이라고 강변했다.
나라땅의 요시노산은 실제로 벚꽃의 명소다. 일본인들 사이에는 “요시노의 벚꽃을 구경하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없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누가 요시노산을 일본 벚꽃의 명소로 만들었을까. 나라땅은 고대 한국에서 건너간 불교가 꽃핀 터전이다. 538년 백제 제26대 성왕(523∼554 재위)이 왜왕실로 백제 승려와 불경, 불상을 보내 불교를 포교하기 시작했다. 그 터전에 요시노산이 우뚝 서있다. 한국 고대의 승려들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마다 벚나무 종자를 갖다가 요시노산 등지에 심지 않았겠는가 추찰하게 된다.
◇간무 천황의 교토 헤이안경의 이름난 벚꽃인 ‘시다레 사쿠라’(꽃가지가 축 늘어지는 벚꽃)가 핀 ‘시신전’ 앞(왼쪽), 요시노산 금봉산사 경내의 백제계 역소각(役小角)의 ‘행자당’

교토대 사학과 하야시야 다쓰사브로(林屋辰三郞) 교수는 다음처럼 밝혔다. “옛날에 행자(行者)인 역소각(役小角, えんのおづぬ)이 오미네산(大峰山)을 수도장으로 개산(開山)했을 때, 요시노산 기슭에다 벚나무를 심고, ‘이 나무는 장왕(藏王)보살의 신목(神木)이므로 손상을 입히는 자들은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겁먹고 꺾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자들이 벚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벚나무가 날로 늘어나 드디어 온 산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고 한다.”(‘奈良歷史散步’ 1965)
행자 역소각은 누구인가. “생몰년 미상. 나라(奈良)시대(7∼8세기)의 주술자(呪術者)이다. 반도계(半島系)의 주술자 한국 광족(韓國 廣足, からくに ひろたり)의 스승. 699년 세상을 어지럽혀 민심을 혼란케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이즈’섬에 유배당했다. 후일 여러 가지 전설이 유포되었으며 수험도(修驗道)의 개조(開祖)로 추앙받았다”(‘日本史辭典’ 角川書店, 1976)는 기록으로 미루어 역소각은 백제인 산악불교 지도자였던 것 같다. 일본의 ‘역사사전’을 다시 살펴보면 “수험도라는 것은 원시적인 산악 신앙과 불교의 밀교적인 신앙이 서로 합친 종교다. 나라시대의 역소각이 개조”라고 돼 있다.
일본 고대사에는 벚나무 기사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우리 ‘삼국유사’에서 승려 충담의 ‘앵통(櫻筒)’ 기사(765)가 있다. 이것은 한일 양국을 통틀어 최초의 벚나무 사적(史籍)이다.

다시 한일동족설에 대해 살펴보자. 에도시대(1603∼1867)의 저명한 고증학자 도 데이칸(藤貞幹, 1732∼1797)은 “일본 인종의 대부분은 백제인으로 조직되었다”(‘衝口發’ 18세기)고 단정했다. 문헌상 두 번째의 한일 동종설이다. 그 후 한일합방 직전에 도쿄대학 사학과의 고증 사학자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1839∼1931) 교수가 자신의 저서 ‘일본고대사’(1907)에서 재차 “한일은 동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에 고개를 든 것은 교토대 기다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 교수의 ‘일선민족동원론’(日鮮民族同源論, 1924)과 고쿠가쿠인대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 1872∼1967) 교수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1929) 등이다.
기다 교수의 ‘일선민족동원론’은 일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저의가 담긴 악의적인 논술이었다. 그러기에 교토대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가 다음처럼 기다 교수를 논리정연하게 비판한 것을 주목하게 된다. “1910년 조선 ‘병합’(倂合) 때, 열심히 일본과 조선의 ‘동종’(同種)을 주장한 주요 인물의 하나가 기다 사다키치였다. 그해 8월 일본역사지리학회에서 그가 ‘병합’ 기념 강연을 행했는데 그 기념강연을 바탕으로 간행된 것은 ‘한국의 병합과 국사’이다. 그 ‘동종론’은 ‘동화융합’(同化融合)에 의한 ‘민족’의 성립을 주장한 것으로서, 뒷날의 ‘일본민족’ 성립론의 골자로 이어지는 것이었다.”(‘민족과 역사’ 제6권 제1호 1979)
가나자와 쇼사브로의 ‘일선동조론’은 양국 역사를 바탕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한일 동족의 근거가 될 만한 사항들을 담고 있어서 기타 교수와는 궤를 달리하고 있다. 물론 ‘일본서기’의 역사 왜곡 기사를 수정없이 다룬 것도 있다. 그러면서도 고대 한국은 일본을 개발시켜준 선진국임을 강조했고, 간무천황의 어머니 화신립 황태후가 백제 무녕왕의 후손인 것과, 백제 성왕의 일본사당 ‘히라노신사’(平野神社, 교토)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한일 양국어를 비교 연구하면서 언어의 동화 등도 다루었다.
광복 이후의 괄목할 만한 한일동족설은 도쿄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의 ‘기마민족국가’(1948)설이다. 이는 제2차세계대전 패배 직후의 일본 사학계를 뒤흔들었다. 도쿄대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에가미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기마민족인 고구려가 세력을 확대시켰던 무렵 고구려와 똑같은 퉁그스(Tungus)계의 북방 기마민족의 한 파가 한반도를 남하해 남단 가야 지방의 왜인을 정복하는 동시에 일본땅에도 침입했다. 이 무렵 일본의 왜인들 사이에서는 야마토(나라 등의 지역)를 중심으로 통합이 진행되고 있었다. 4세기 초에 천황씨(天皇氏)를 중심으로 하는 기마민족이 규슈땅에 상륙했다. 그리고 나서 야마토에 들어가 ‘100년도 채 지나기 전에’ 즉 4세기 말 내지 5세기 초에 강대한 왕권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에가미씨의 대담한 학설은 매우 유력한 몇 가지의 논거로 이뤄지고 있다. (중략) 천황씨 자체가 본래 한국으로부터 건너온 이주자였기 때문에, 많은 귀화인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日本國家の起源’ 1967)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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