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폭풍우가 밤잠을 설치게 하더니 집 뒤 갈대밭의 갈대들이 이리저리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 큰 나무 가지도 부러뜨려 길을 막히게 해서 교통을 마비시키기까지 했던 강한 비바람은 갈대밭에서도 한바탕 분탕질을 한 모양이다. 엊그제만 해도 키 큰 갈대꽃들이 무리 지어 질서정연하게 가을바람에 일렁였는데...
축 늘어진 갈대들이 너무 초라하다. 사람도 건강할 때 보기 좋고 식물도 생생할 때가 아름답다. 그러니 생명 있는 것은 항상 건강해야 한다. 폭풍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갈대들은 맥을 놓고 있다. 저것들이 다시 고개를 들어 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갈대밭은 부엌에서 내다보면 바로 눈길이 가는 곳이다. 그곳은 내가 집에 있을 때 이 부엌에서 가장 많이 바라다보는, 눈으로 보면서 노는 내 마음의 놀이터이다.
잔디밭과 붙어있는 작은 숲의 왼쪽에 있는 갈대밭은 봄이면 파릇파릇한 새순으로 태어나서 여름이면 키가 훌쩍 자라 하얀 털의 꽃을 달고, 가을이면 벼이삭처럼 고개를 숙였다가 겨울에는 쓸쓸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곳에 까치인지 기러기인지, 새떼가 앉았다가 날아가기도 한다. 부채처럼 나무들에 둘러싸인 작은 갈대밭은 석양 무렵이면 참으로 아름답고 서정적이어서 한참을 바라봐도 좋다. 늦가을이면, 바로 옆에서는 붉은 단풍이 활활 타고 있는데, 저들은 사각이며 소곤거린다. 그런 소리를 듣는 것도 참 괜찮다.
갈대는 산에서 나는 억새와 비슷하게 생겼으면서도 강가나 늪지대에서 난다. 아마도 물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거실은 작아서 제대로 된 소파도 한 세트 들여놓지 못하고, 침대를 놓고 나서 빈 공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는 작은 방이 답답한 그런 작은 집이었어도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은 잔디밭을 지나 바로 옆에 붙어있는 이 갈대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갈대를 보기 위해 어딘가에 있을 갈대밭을 찾아가기도 하는데, 내 집 뒤에 붙어서 저절로 나의 밭이 된 이 갈대밭은 15년이 넘도록 나의 마음의 놀이터가 되어주고 있다.
갈대밭과 작은 숲이 붙어있는 잔디밭에 사슴이라도 나와서 놀면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다. 그 모습을 남겨두고 싶어 카메라를 찾으면 플래시를 터뜨리기 전에 사슴은 숲으로 도망을 가 버리고, 사각거리며 구경하던 갈대들은 멍하게 서 있다.
이번 폭풍이 불기 전에 갈대밭은 누렇게 채색되고 있는 꽃을 달고 수려한 풍경으로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폭풍이 훑고 간 자국으로 몸살을 하고 있는 것이다.
뉴저지 저 남쪽 끝이라 했던가. 작고 아름다운 한 시골마을 끄트머리쯤 내가 존경하는 이 박사님의 시골집이 있었다. 그곳엔 넓디넓은 산도 있고, 계곡도 있고 들판도 있었다. 계곡에는 금강산에서 본 듯한 작은 폭포도 있고, 그 폭포 아래에는 선녀가 목욕을 했음직한 연못도 있다. 바로 옆엔 선비들이 시를 읊고 술잔을 들었을 것 같은 너럭바위도 있었다. 산에는 온갖 나무들이 열매를 달고있기도 하면서 푸른 잎의 숲을 이루었다. 이 박사님이 직접 심은 나무만도 3천 그루라고 한 것 같다. 산 위 넓은 들판 같은 곳엔 이름 모르는 작고 예쁜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4계절의 이름을 따서 산책길 이름이 지어져 있었는데, 내가 걸은 길이 봄 길이었는지, 가을 길이었는지 헷갈린다. 길마다의 특성이 있어서 재미있기도 하려니와 사슴이나 곰 등 동물들이 놀다 간 자국까지 있고, 둥지 튼 새 집까지 기억하는 주인의 기억력에 놀랍기도 하면서 꿈길 같은 길을 초가을에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걸었다.
산 제일 위에 올라갔는데, 왼쪽 저 아래로 누렇게 물들어 가는 갈대밭이 숨은 듯 앉아 있었다. 아, 내 육안으로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갈대밭을 보기는 처음이다. 가늘게 내리는 빗속으로 보이는 갈대밭의 아름다움이라니. 저 아래에서 계곡을 타고 위로 올라왔는데, 어떻게 이곳에 늪이 있는 것일까. 물이 늪을 통과해서 계곡으로 흐르는 것일까. 갈대밭을 안고 있는 넓은 늪은 어디 한 군데 인위적으로 손을 댄 곳 없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1시간 가량 올라갔다 온 그곳은 꼭 꿈속에서 본 풍광처럼 내내 눈에 아른거린다.
갑자기 화가가 되고 싶다. 갈대, 갈대밭을 그리고 싶어서다. 강가이거나 늪지이거나 바람이 불면 바람결에 따라 춤을 추고, 내가 태어난 고향 집 뒤뜰 울타리부터 산 가득 무성하게 자라던 대나무 잎이 사각거리는 것처럼 속삭이는 갈대를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
며칠 전에 지나간 폭풍으로 내 작은 갈대밭이 몸살을 하며 앓고 있는 중이다. 그 갈대밭을 내마음 속의 텃밭으로 여겨온 나도 덩달아 앓고...
김옥기 스페이스 월드 관장
<전교학신문>전교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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