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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구다라 위덕왕이 보낸 비불 ''구세관음'' 라(奈良) 땅 호류지(法隆寺)에는 백제관음 외에 또 하나의 훌륭한 녹나무(樟木) 구다라 불상 ‘구세관음(救世觀音)’이 있다. 호류지 경내 서쪽 서원에 들어서면 유메도노(夢殿)라는 팔각지붕 전당 안에 봉안되어 있다. 

호류지에는 백제관음과 함께 구세관음이 쌍벽을 이루며 구다라 불교미술품의 극치를 보여준다. 유메도노의 구세관음은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 554∼598년 재위)이 6세기 말경에 왜 왕실로 보내준 오늘의 일본 국보이자 비불(秘佛)이다. 

구세관음은 평소 공개하지 않고 1년에 두 번, 봄가을 단기간(4월11∼5월5일, 10월22일∼11월3일)만 공개된다. 이 기간에는 일본 각지에서 백제관음과 구세관음을 동시에 보기 위해 찾는 인파로 붐빈다.
◇쇼토쿠태자 2세상(2살 때의 모습 목상).



일부 일본 학자들은 백제관음과 마찬가지로 구세관음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백제로부터 온 것이 아닌 ‘일본제’라는 내용의 글을 써왔다. “일본에서 구세관음을 만든 연대는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574∼622년)가 죽은 뒤인 스이코 여왕(推古 592∼628년) 말기로부터 조메이조(舒明 629∼641년)로 추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太田博太郞·町田甲, ‘國寶·重要文化財 案內’, 1963년)
규슈예술공대의 불교 미술사학자 오니시 슈야(大西修也) 교수도 그의 저서에서 “호류지의 팔각 전당(유메도노)에는 쇼토쿠태자가 살아 있던 시기에 그의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구세관음을 안치하고 있다”(‘호류지·Ⅲ·미술’, 1987)고 지적했다. 이렇게 일본에서 만든 것으로 쓴 오니시 교수의 저서의 부록인 ‘참고문헌’란(218쪽)에 보면 “이 글을 쓰느라 ‘쇼토쿠태자전력’과 ‘부상략기(扶桑略記)’를 기본 자료로 인용해서 그가 이 책을 저술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니시 교수가 참고했다는 일본 고대 불교 서적인 ‘쇼토쿠태자전력’과 ‘부상략기’를 필자가 직접 읽어보면 “백제 위덕왕이 성왕을 추모하여 구세관음상을 만들었으며, 백제가 왜 왕실에 보냈고, 법흥사 금당에 서기 593년에 안치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불상은 백제에서 만들었으며, 왜나라에 보내 왔을 당시에는 법흥사(法興寺 - 飛鳥寺·아스카데라 아스카 소재)에 모셨던 것을 뒷날 호류지(이카루가·斑鳩)로 다시 옮겼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구세관음을 왜 왕실로 보내준 위덕왕은 백제 제26대 성왕(聖王 523∼554년 재위)의 제 1 왕자이다. 성왕은 서기 538년에 몸소 일본에다 불교를 전파한 왕이다. 위덕왕이 구세관음을 왜나라로 보낸 발자취를 상세하게 기술한 것은 호류지 고문서 ‘성예초(聖譽抄)’이다. 지난날 필자가 발굴한 ‘성예초’의 구세관음 기술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호류지 사찰의 ‘유메도노(夢殿)’ 안에 봉안된 구다라의 비불 녹나무 구세관음상. 발견자 페놀로사 교수는 “머리에는 경탄스러운 조선식 금동 조각으로 된 관과 보석을 흩뿌린 것 같은 여러 줄의 긴 영락들이 늘어져 있었다”고 감탄했다.


“백제 위덕왕은 서거한 부왕인 성왕을 그리워하여 그 존상(尊像)을 만들었다. 즉, 그것이 구세관음상으로서 백제에 있었던 것이다. 성왕이 죽은 뒤 환생한 분이 일본의 상궁(上宮) 쇼토쿠태자이다. 상궁태자의 전신(前身)은 백제 성왕이다.”
‘성예초’에는 위덕왕이 부왕을 흠모하여 아버지의 존상을 만들어 왜나라로 보내주었다는 것과 쇼토쿠태자는 서거한 성왕이 환생한 인물이라고 하는 불교의 신비한 윤회전생의 내용까지 담고 있어 매우 주목된다.
‘성예초’는 지금부터 약 600년 전인 오에이(應水) 연간(1394∼1427년)에 호류지에서 저술된 귀중한 고문서를 1786년에 호류지의 학승 센한(千範)이 다시 필사한 고문헌이다. 이렇듯 일본 고대의 각종 불교 고문서에서는 구세관음을이 위덕왕이 만들어 일본으로 보내왔다는 것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성예초’보다 약 200년 전의 13세기 사서인 ‘부상략기’의 기술은 다음과 같다. “금당에 안치된 금동 구세관음은 백제 국왕이 서거한 뒤에 국왕을 몹시 그리워하면서 만든 불상이다. 이 불상이 백제국에 있을 때에 백제로부터 불상과 함께 율론(律論), 법복, 여승 등이 왜 왕실로 건너왔다.”(스이코 원년조)
이 당시인 6세기 말경에 벌써 백제로부터 여승도 왜 왕실로 건너 왔다고 한다. 또 여기서 ‘금동불상’으로 기술한 것은 녹나무에다 금박한 것을 그 당시 초기에는 나무가 아닌 청동에 도금한 것으로 잘못 알았던 것 같다.
◇팔각 지붕의 ‘유메도노’ 전당. 여기서 쇼토쿠태자가 기거했다.



◆미국 학자가 먼지더미 속에서 찾아낸 불상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오랜 세월 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구세관음을 찾아낸 것은 미국인 동양사학자 페놀로사(E F Fenollosa 1853∼1908년) 교수였다. 그는 지금부터 122년 전인 1884년 유메도노 한구석에서 먼지가 잔뜩 쌓인 큰 짐 보따리를 손수 풀어헤쳤다. 짐꾸러미에는 구세관음이 들어 있었다. 그때 이 불상은 길고 긴 무명천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감겨 있었다. 페놀로사 교수가 이 커다란 짐 보따리를 감싼 천을 손수 풀어내지 않았다면, 이 훌륭한 구세관음은 지금까지도 그냥 짐 보따리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까지 호류지의 승려들은 이 짐 보따리를 푸는 것을 금기시하며 매우 두려워했다. 누구이거나 함부로 건드리면 불벌(佛罰)을 받는다고.
놀로사 교수가 유메도노 안에서 이 커다란 짐 보따리 같은 것의 천을 풀 때 우연히도 하늘이 일시에 시커멓게 어두워졌고, 지켜보던 승려들은 불벌이 두려워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龜井勝一郞, ‘大和古事風物誌’, 1942년)
페놀로사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구세관음의 천을 풀던 당시 먼지가 몹시 풍기던 광경부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심스럽게 무명천으로 감은 훌륭하기 그지없는 물건 위에는 오랜 세월의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무명천은 풀기가 쉽지 않았다. 휘날리는 먼지에 질식할 것 같은 위험을 무릅쓰고 거의 500야드(1야드는 91.44cm)의 무명천을 모두 풀었다고 여겼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감싼 천이 떨어지면서 이 경탄해 마지 않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조상(彫像)은 대뜸 본인의 눈앞에 나타났다. 모습은 인체보다 조금 컸고, 어떤 단단한 나무로 매우 면밀하게 조각했으며 금박을 입혔다. 머리에는 경탄스러운 조선식(朝鮮式) 금동 조각으로 된 관(冠)과 보석을 흩뿌린 것 같은 여러 줄의 긴 영락들이 늘어져 있었다…. 우리는 일견 이 불상이 조선에서 만든 최상의 걸작이며, 스이코 시대의 예술가, 특히 쇼토쿠 태자에게 있어서 강력한 모델이 된 것이 틀림없다고 인식했다.”(‘東亞美術史綱’, 有賀長雄 譯, 1912년)
불상을 싸맨 무명천의 길이가 약 500야드나 되었다니 엄청나게 긴 천이 똘똘 말려 있었던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불상을 감싼 무명천이 언제부터 감기게 되었는지, 왜 유메도노에 그냥 방치되고 있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없다. 어쩌면 법흥사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카루가의 호류지로 옮길 때의 무명천을 풀지 않고 그대로 유메도노에 1200여년간 놓아두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무명 천을 풀지 않은 것인가 하는 의문도 뒤따르게 된다. 호류지의 유메도노는 건축된 이후 쇼토쿠태자가 침식하며 기거한 전당이다. 여하간 지금처럼 유메도노 중앙에 구세관음이 봉안된 것은 페놀로사 교수가 무명천을 푼 뒤부터다.
뒷날 백제 옷을 입었던 백제 계열 스이코여왕의 생질이며 섭정을 했던 쇼토쿠태자(부왕은 요메이·用明왕, 585∼587년 재위)에게 구세관음은 불교 신앙의 성스러운 모델이 되었던 것을 페놀로사 교수가 지적하고 있다.
쇼토쿠태자는 백제에서 왜 왕실로 건너온 학승 혜총(惠聰)과 고구려 학승 혜자(惠慈)를 스승으로 모시고 어린 소년 시절부터 법흥사에서 성실하게 불경을 공부한 돈독한 불자였다.
◇왼쪽부터 서원인 유메도노 입구의 정문, 유메도노 앞의 필자.

나라 땅 이카루가의 호류지는 요메이왕이 병석에서 신음할 때, 효성스러운 어린 쇼토쿠태자와 고모인 가시키야 공주(뒷날의 스이코 여왕)가 불력으로 쾌유를 발원하여 서기 607년에 백제 건축가들이 세운 사찰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호류지 건물은 서기 670년에 화재가 나서 뒷날 재건되었다”(黑川眞賴 등)고 주장했다. 이에 도쿄대학 건축과 세키노 다다스(關野貞 1867∼1935년) 교수는 “현재의 호류지 ‘금당’과 ‘오중탑’ 등은 ‘고구려자’를 사용하여 서기 607년 지은 건축물이다”(‘호류지 금당탑 파중문비 재건론’, 1905년)라고 규명했다. 세키노 교수는 607년에 호류지를 지어졌다는 사실을 그 당시 백제 건축가들이 사용했던 ‘고구려자’(高麗尺·고마샤쿠)를 가지고 직접 호류지 건물을 실측함으로써 입증했다.
7세기 말∼ 8세기 경부터 지어진 건축물들은 고구려자가 아닌 ‘당나라자(唐尺)’를 사용했기 때문에 건축물의 치수가 서로 다르다. 일본 역사에서는 ‘고구려’(BC 37∼AD 668년)를 ‘고마(高麗·こま)’로 표기하며, ‘고려’(918∼1392)는 ‘고라이(高麗·こうらい)’라고 서로 다르게 쓰고 있다. 참고로 고구려 스님들이 왜나라로 가져온 완구라는 뜻으로, 일본에서는 ‘팽이’를 ‘고마(獨樂)’라고 부른다.
페놀로사 교수의 학문적 탐구열에 의해 다행스럽게 발굴해 낸 구세관음은 불상의 높이가 179.9㎝이며 녹나무로 조각하여 금박을 입힌 목조 구다라 불상이다. 동양미술사학자 페놀로사 교수는 스페인계의 미국인이며, 1878년 일본에 건너와 도쿄미술학교 창설에 참여했다. 하버드대학에서 철학을 배운 그는 1890년에 귀국하자 보스턴미술관의 동양부장이 되어 한·중·일 미술 연구 등에 힘썼다. 끝으로 지적하자면 목재학자 오바라 지로 교수가 “녹나무는 한국에는 자생하지 않고 일본과 중국 등에만 자라났다”(1971년)고 주장했는데, 아직도 그의 이론을 따르는 역사 왜곡이 잇대어 빚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 고문서학의 태두인 도쿄대학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년) 교수가 쓴 일본 사학계의 명 논문인 ‘신도(神道)는 제천(祭天)의 고속(古俗)(1891년 10∼12월)에는 “신라로부터 삼나무, 전나무, 녹나무, 피나무의 종자를 일본에 가져다가 심었다”는 일본 고대의 식물 발생 자취도 보인다.
(다음 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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