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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③백제인 숨결 깃든 구다라관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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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08-09 12:40:00 수정 : 2006-08-09 12: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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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고대 백제 예술혼''구다라나이'' 대명사 되다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대표적인 국보 불상은 ‘구다라관음(百濟觀音)’이다. 백제가 7세기 초에 나라(奈良) 땅 왜 왕실로 보내준 훌륭한 녹나무 불상이다. 흡사 늘씬한 여성처럼 쭉 뻗은 키 2m28cm의 입상. 현재 일본 나라 땅 ‘호류지’(法隆寺·607년 백제 건축가들이 세움) 경내의 ‘구다라관음당’ 안에 모셔 있으며, 누구나 관람이 가능하다. 백제 왕실이 왜 왕실로 이 불상을 보내주었을 때의 명칭은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이었다. 그런데 18세기경부터 본래의 명칭은 사라져버리고 이 사찰에서조차도 구다라관음, 즉 ‘백제관음’이라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일본 각지에서 일인들이 나라 땅의 호류지를 찾아가는 것은 이 구다라관음을 보기 위해서다. 그만큼 일인들의 찬양을 받고 있는 것이 백제에서 건너간 구다라관음이다. 그러기에 일본의 저명 학자나 명사치고 옛날부터 이 불상에 대하여 글을 쓰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구다라관음은 백제의 불상 조각가가 한 둥치의 녹나무(樟木)로 만든 입상이다. 녹나무란 좀약을 만드는 방충제의 원료가 되는 목재인 만큼 벌레가 먹거나 쉽사리 썩지 않는다. 백제인이 슬기롭게 만든 이 녹나무 불상은 장장 1300여년을 왜나라 터전에서 줄기차게 버티고 있다.
허공장보살이라는 이름이 구다라관음으로 바뀐 것은 어떤 까닭에서일까. 이 녹나무 불상은 구다라의 빼어난 불교 미술품이기에 저마다 “구다라에서 건너온 훌륭한 관음불상이다”라는 계속되는 찬사 속에 어느 사이엔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백제 것만이 최고다”라는 “구다라나이”의 대명사가 되고만 것 같다. 아무래도 구다라관음이라는 명칭 등장은 매우 자연스러운 구다라 찬양의 발자취라 할 수 있다.
교토대학 총장을 역임한 고고미술사학자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1881∼1938) 교수는 백제로부터 건너온 이 불상의 ‘구다라’ 명칭에 관해 “이 불상을 ‘구다라관음’으로 부르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온 이후 ‘허공장보살’로 불러왔다고 하는 것은 이 불상의 아래쪽 대좌에 불상의 명칭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百濟觀音·1948)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하마다 교수는 일찍이 구다라관음이 허공장보살이란 명칭으로 백제로부터 건너온 것을 시인했다. 이 구다라관음이 백제에서 왔다고 하는 발자취는 필자가 지난날 발굴한 호류지 고문서인 ‘제당불체수량기 금당지내(諸堂佛體數量記 金堂之內)’에 “허공장보살은 백제국으로부터 도래하였다(虛空藏菩薩百濟國ヨリ渡來)”라고 쓰여 있는 데서 알아냈다. 저명한 역사지리학자였던 요시다 도고(吉田東伍·1864∼1918) 박사가 저술한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辭書·1900)에서도 “허공장보살을 가리켜서 구다라관음으로 부르게 된 것은 백제국에서 보내준 목상관음상(木像觀音像)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1971년, 느닷없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논문이 나타나서 일본 국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녹나무로 만든 불상 ‘구다라관음’은 결코 ‘구다라(백제)’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고대 일본 특산 나무를 가지고 일본에서 만든 불상이다. 왜냐하면 조선에는 녹나무가 자라나지 않기 때문이다. 녹나무는 일본, 대만 및 중국에서만 자생하며, 조선에는 분포하지 않는다.”(上代木彫の用材·1971)
이렇게 주장한 사람은 그 당시 일본 지바(千葉)대학의 목재학 담당 오바라 지로(小原二郞) 교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하루아침에 일부 일인들의 환호성을 올리게 했다.
그런가 하면 도쿄교육대학의 미술사학자 마치다 고이치(町田甲一) 교수가 일본 NHK방송(교양프로 ‘문화전망’·1989)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방송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모든 일본인이 찬양해 왔던 자랑스러운 국보 구다라관음은 구다라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내온 구다라 불상이 아닙니다. 이 녹나무 구다라관음이야말로 고대에 일본인이 일본에서 만든 불상입니다. 왜냐하면 한국 땅에서는 녹나무가 자라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목재 전문학자 오바라 교수에 의해서 명백하게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구다라관음상(왼쪽), 녹나무 구다라관음상(국보불상 기념우표).

목재학자 오바라 교수의 돌출적인 연구 논문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발표되고, 일본의 이름난 미술사학자가 잇달아 방송을 통해 이를 알리자, 하루아침에 구다라관음의 자랑스러운 백제 불교미술품의 명성은 실추되기 시작했다. 과연 한국에서는 녹나무가 자생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때마침 그 방송을 청취한 녹나무 장뇌사(樟腦史) 전문가인 야마모토 렌조(山本鍊造)라는 학자가 이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다음처럼 일축했다.
“현재도 한국에는 녹나무가 엄연히 자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300년 전에 녹나무가 한국에 없었다고 하는 적극적인 증거가 없다면 한국에 녹나무가 자생하지 않았다고 감히 누구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大和古寺巡歷·1989)
결국 목재학자와 미술사가는 야마모토가 녹나무의 한국 자생을 규명함으로써 학문적으로 각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구다라관음은 그 이후 다시금 일본 문화재 관계 당국자들에 의해 잇달아 수모를 당했다. 1997년 9월 10일부터 2주일간 구다라관음이 프랑스에 나들이하여 파리 루브르박물관 ‘드농관’에 특별 전시돼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다. 그 당시 구다라관음은 프랑스 정부가 제정한 ‘일본의 해’ 기념으로 일본 나라 땅 호류지로부터 파리로 공수되었다. 막대한 보험료가 달렸다는 이 백제 불상에 관한 전시실 ‘게시문’은 다음과 같았다.
“이 구다라관음은 한국(구다라)으로부터 건너왔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비슷한 양식의 목조불상이 그 당시 중국이나 한국의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 비추어 ‘의심할 나위 없이’ 일본에서 제작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호류지 고문서에 “백제에서 건너왔다”는 옛날 문헌이 입증하고 있으나, 게시문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일본제임을 확신한다”고 거짓 주장한 것이다.
또한 2001년 6월에 간행되어 한일 간에 큰 말썽을 빚은 책이 대표 집필자 니시오 간지(西尾幹二)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였다. 이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도 백제관음상의 컬러 사진을 화보(3쪽)에 싣고, “구다라관음은 아스카 시대(592∼710)를 대표하는 우미한 불상이다. 녹나무는 조선에 자생하지 않으므로 구다라관음은 일본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단정하고 있다. 일본에서 이 교과서는 해마다 일부 학교가 채택하여 쓰고 있다.
한편 현재 호류지가 방문객에게 배포하고 있는 ‘호류지 약연기(略緣起)’라는 선전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참고 삼아 그 머리글을 옮긴다.
“호류지에 전해지고 있는 백제관음상(아스카 시대)은 일본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불상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일본 불상으로서는 진기하게도 팔등신의 날씬한 모습과 우미하며 자비 큰 그 표정은 수많은 사람을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하략).”
이와 같은 글도 구다라관음의 발자취를 모르는 관람객에게는 백제에서 보내온 구다라 불상이라는 사실이 올바르게 전달되기 힘든 기술일 따름이다.
더구나 ‘구다라관음’을 일본 것으로 내세우는 역사 왜곡은 현재 일본의 한 포털사이트(www.google.co.jp)의 ‘역사판(歷史板) 퀴즈’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 사이트에서는 ‘백제관음’에 대한 질문에서 “1951년에 일본 국보로 지정된 호류지 구다라관음상. 이 불상이 ‘구다라관음’으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별도의 객관식 해답란에서 ‘구다라’로 호칭하는 까닭은 “후세 사람들의 착각(後世の人の勘違い) 때문”이란 답을 만들어서 제시하고 있다.
1971년 7월8일, 충남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무령왕 머리맡에서 발견된 장식의 연화당초문은 백제관음의 보관(寶冠) 장식과 똑같다. 구다라관음이 백제에서 건너간 불교미술품이라는 증거다. 오늘날 호류지에 건재하는 구다라관음이야말로 “백제 물건이 아니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전형적인 ‘구다라나이’의 표본 백제 문화재이다. 여기 한 가지 곁들여 밝혀 두자면 8·15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부가 일본에 요청했던 ‘한국문화재 반환 청구 제1호’가 백제관음이기도 했다.
일본고대사 연구가 우다 노부오(宇田伸夫·1952∼)가 근년에 쓴 역사 저술 ‘구다라가엔’(百濟花苑·2002)을 보면 남편 조메이왕이 건축한 구다라궁(百濟宮)에서 살던 고교쿠(皇極·642∼645 재위) 여왕 당시 하시히토(間人) 공주와 히이라기 궁녀의 대화에서 공주가 정원의 붉고 아름다운 ‘잇꽃’을 가리키며, “이 꽃은 어디서 이곳 아스카(백제인 왕실 터전: 필자주)에 온 것이지?” 하고 묻자 궁녀가 서슴없이 대답한다. “물론 구다라에서 전해온 것이지요” 하자, “좋은 것은 모두 구다라에서 온 것이구나”라는 공주의 감탄이 나온다. 즉 ‘구다라나이’다.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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