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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22일, 한국인 독일에 서다[2-1]

입력 : 2008-01-05 18:58:00 수정 : 2008-01-05 18: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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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표적인 공업지역인 루르지역으로 분류되는 '광산도시' 캄프-린트포트에 위치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광산의 원경(김용출, 2004.05)


▶1963년 12월 22일, 한국인 광부 독일에 서다

한번 핀 꽃은 시들고, 젊음도 늙음을
피할 수 없듯, 우리의 모든 생의 단계도 꽃피고,
모든 지혜도 그리고 모든 미덕도
한철은 꽃피지만, 영원히 지속될 순 없다.
우리의 마음도 언제나 생이 외치는 소리에
선뜻 이별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
눈물 따윈 흘리지 말고 씩씩하게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
...
우리가 인생을 한 곳에 묶어 두고 거기에
친숙해지는 순간, 무력감이 우릴 덮쳐 온다.
언제나 떠나고 방랑할 자세가 된 사람이
습관이라는 마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의 죽음의 순간마저도
우리에게 새로운 젊은 공간을 보내리라.
우릴 향한 생의 부름은 결코 그침이 없으리라...
그렇다면, 마음아, 이별을 하고 건강하게 살자!
(헤르만 헤세, 김재혁 역, '층계' 중에서, "인생의 노래", 이레: 서울, 2001, 286~287쪽)

1963년 12월 22일 오후 6시, 독일 노드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시의 ‘뒤셀도르프 공항’. 에어 프랑스 제트기 한 대가 마찰음을 내면서 착륙했다. 비행기는 하루 전인 21일 오전 9시45분 서울 김포공항을 출발, 북극항로를 거쳐 16시간만에 이곳에 닿은 것이다.

탑승객들이 차례차례 내리기 시작했다.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은 검은 머리의 한국인, 바로 그들이었다. 모두 파독광부 1차1진이었다. 1차1진은 모두 123명. 이들은 독일에 임노동을 제공하기 위해 이역만리를 날아온 것이다.

파독광부들은 비행기 밖에 펼쳐진 풍경에 놀란 듯 트랙에 내려서면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곤 했다. 일부는 소리쳐 환호하기도 했고, 일부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파독광부들은 대부분 양복을 입었고, 머리엔 기름까지 바른 이도 있었다. 또 카메라를 목에 걸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독일인의 눈에는 한국인 파독광부들이 어떻게 비쳐졌을까. 어쩌면 ‘맙소사’라는 말로 잘 압축되는 지도 모른다. 작업복을 입은 광산 근로자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광부의 입국 모습을 기억하는 당시 광산회사 간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남정호 기자는 기록하고 있다.

처음 한국 광부들이 전세 비행기를 타고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광경이라니...맙소사...머리엔 포마드를 반지르르 바르고 넥타이에다 카메라는 거의 한 대씩 목에다 걸고 트랩을 내려서는데...이건 관광객들인지, 비즈니스맨들인지...(남정호 기자, 「글뤽아우프는 파독광부사에서 애환의 대명사」,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엮음, 『파독광부 30년사』, 1997, 169쪽).

이들은 1963년 12월21일 오전 9시45분 당시 경제기획원 이창제 사무관의 인솔을 받아 ‘에어 프랑스’ 전세기를 몸을 싣고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가족들은 그들의 건승을 빌었고, 그들의 가슴에는 모두 이역만리 먼 곳에서 자신의 포부를 채워보려는 꿈이 부글거리고 있었다. 언론에서도 이들의 희망찬 출발을 보도하기도 했다.

미끈한 ‘에어 프랑스’ 제트기에 모을 실은 젊은 광부들은 제가끔 낮선 곳에서 포부를 채워보려는 부푼 마음으로 전송나온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며 크게 웃음짓는 패들이 많았다.

처자를 두고 가는 광부들은 눈물짓곤 했지만 총각 광부들은 돈벌이하러 가는 길이라 웃음을 앞세웠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자 모두들 섭섭한 표정들이었다(『서울신문 1963년 12월21일』, 7면).

모든 이별에 희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분간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이별의 슬픔, 앞으로 영영 못 볼 수도 있다는 가려진 우려, 그리고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또한 있었다. 중절모를 쓴 아버지와 손수건이나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는 어머니, 그리고 눈물이 그치지 못하는 여동생...그들의 아버지는 마음으로 울었고, 어머니는 사랑으로 울었으며, 여동생은 그리움으로 울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한국을 떠났다.

1963년 12월 22일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한 1차1진 123명은 크게 두 곳으로 분산, 배치됐다. 63명은 북부의 함본 탄광회사에, 나머지 60명은 남부 에슈바일러 탄광회사에 배정됐다.

본과 클뢰크너 광산 중간 사이의 두이스부르크에 위치한 함본 광산은 티센 광업소와 베스텐데 광업소, 로베르크 광업소 등 3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광업소간 거리는 25킬로 안팎. 함본 프리드리히 티센 광산(Friedrich-Thyssen)은 RAG 소속 광산이다. 5개의 샤크트가 있으며, 탄광의 최고 깊이는 1023미터. 1975년 150만톤의 생산량을 기록하다가 1977년 폐광했다. 한편 뒤이스부르크엔 함본 프리드리히 티센 광산뿐만 아니라 RAG 소속의 발줌(Walsum) 광산도 있다. 엄청난 석탄 저장량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슈바일러 광산은 본에서 남쪽으로 100킬로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매르크슈타인, 오프덴 등 5개 지역으로 분산돼 있다. 이들 광업소간 거리도 20킬로에 이른다.

곧이어 5일 뒤인 27일, 1차1진 나머지인 124명이 노동청 심강섭 직업안정국장 직무대리와 대한석탄공사 유항규 기술과장의 인솔을 받아 독일에 왔다. 62명은 북부 에센 탄광회사에, 62명은 북부 클뢰크너 탄광회사에 각각 분산 배치됐다.

클뢰크너 광산은 본에서 북쪽으로 160킬로 떨어진 곳에 있었다. 카스트롭라욱셀과 라우헬 등 2개 지역으로 분산돼 있고, 두 곳 사이의 거리는 40킬로쯤 됐다.

겔젠키르켄에 위치한 에센 광산은 ‘훈서프리스’ ‘카타리나 엘리자베드’ ‘콘트로드라이피어’ 등 4개 지구로 구분되어 한 도시의 밑을 파내려갔다. 이 4개 회사에서 하루 9000톤의 역청탄이 생산했으며, 보통 한 회사는 지상에서는 1900명, 지하에서는 2000여명의 광부들이 종사했다고 한다. ‘훈서프리스’ 탄광의 경우 지상 3000미터까지 석탄이 있으며 120층으로 북에서 남으로 뻗어 있었다(최재천, 「서독의 우리광부」,『한국일보 1964년 12월 13일』, 6면 참고).

당시 한국은 1차1진으로 250명을 파독하려 했으나, 247명만이 최종적으로 독일 땅을 밟은 것으로 알려졌다. 2명은 개인사정 때문에 출국하지 못했고, 1명은 서독측에서 입국을 거부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개발시대 한국 경제의 주춧돌을 쌓았던 역사적인 첫 한국인 광부 파독. 이렇게 시작된 한국인 광부 파독은 1977년 10월 26일(2차47진, 138명)까지 이뤄졌다.

파독 광부들은 독일의 지하 곳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으며, 심지어 목숨까지 잃으면서도 연금과 저축,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을 고스란히 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그래서 경제발전을 위해 자본이 필요하던 그 시절, 조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특히 이후 전개된 월남파병과 월남특수, 중동 건설 특수 등 해방 이후 이뤄진 대규모 한국인 노동력 수출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역사적 사건으로도 평가된다. 1960, 70년대 한국의 개발시대를 실제로 열었던 진정한 주인공인 셈이다.

이 같은 역사적인 광부 파독이었지만, 한국인 광부 파독이 누구에 의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결정되고 이뤄졌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추적 결과, 여기엔 가슴 아픈 진실이 웅크리고 있었다.



***자료제공 또는 문의=파독 광부와 간호사님과 관련한 사진, 자료 등이 있으시다면 저의 이메일(kimgija@segye.com)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가능하다면, 소중하게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파일 용량이 많을 경우에는 알집으로 압축해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2-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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