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준 ''믹스트 리얼리티''전 사람들은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말한다. 전시장의 작품들을 보고 때론 이것도 미술인가 의아해한다. 관람객 탓으로 돌리기엔 한국 현대미술의 맥락이 허술하다고 미술인들은 지적한다. 현대미술은 ‘현대성’이라는 화두를 전제로 하고 있다. 현대란 단지 동시대를 뜻하는 의미가 아니라 그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시기를 말한다.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현대 이전의 미적 가치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로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점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요즘 ‘현대미술’을 내건 전시들이 유명 미술관이건 작은 화랑이건 천편일률적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동시대 트렌드의 차용과 서구 미술의 아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진다. 아류가 다원주의라는 그럴 듯한 포장에 숨기도 한다.
원자력 공학도에서 작가로 변신한 안광준(47)씨는 현대미술에서 ‘현대성’을 진지하게 고민해온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사비나미술관에서 3월 1일부터 4월 9일까지 ‘믹스트 리얼리티(Mixed Reality)’전을 여는 그는 자신의 꿈 속 이미지를 작품의 주요 모티브로 차용하여 제작한 작품을 보여준다.
한양대 원자력공학과를 졸업하고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던 안씨는 가수면 상태에서 꿈과 환상을 넘나들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다.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치유 수단으로 꿈 속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대 미대에 다시 입학해 그림을 공부했다. 초기 회화 작업은 꿈의 장면들을 전통회화 방식으로 그려내는 일반적인 회화 작업이었다. 꿈을 주제로 시작하던 평면 회화는 두 장의 드로잉을 합성하여 입체적 공간으로 표현하는 공간 드로잉으로 이어졌다.
디지털 가상공간은 그를 그림 속 공간으로 들어가 보고 싶게 만들었다.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해 마우스 클릭과 키보드의 수치 기입만으로 자신의 꿈의 세계를 생생한 색채와 움직임으로 나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관람객들은 특수안경을 착용하고 조이스틱을 조종하면서 마치 꿈 속에서 보았던 대상이 ‘지금 여기’에 있는 현실세계로 튀어나오는 것 같은 시각 체험을 할 수 있다.
4개로 쪼개진 화면 속에 거대한 여성 누드가 가로수처럼 늘어서고 벌거벗은 여성과 옷을 차려입은 남성이 조깅하는 모습을 대비시킨 공간도 특수 입체안경을 쓰고 보면 4개 화면이 파노라마처럼 연결된 3차원 게임공간이다(Cyber Erotica Park 2006). 대권주자들의 얼굴이 닭이나 고양이, 모나리자 등과 오버랩되는 ‘숨쉬는 트랜지션 모니터’나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을 등장시킨 ‘4강게임’ 등에서는 메시지를 담으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하드웨어’에도 전문가 수준인 그에게 고도로 진보한 과학기술 수준과 관계없이 진행되는 예술은 사기일는지도 모른다.
이제 안씨는 캔버스로 표현되던 회화가 단순 재현을 넘어 멀티매체를 통해 ‘신(新)회화’로 거듭남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웹아트(디지털예술)가 전통회화와는 달리 일루전만으로도 표현이 가능한 ‘표현의 혁신’이라는 점에서 주목한다. 21세기 미술의 단서를 디지털아트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다. 모두가 콘텐츠 생산자가 될 수 있는 작가(생산자)와 소비자(감상자)의 수평적 혼재 구조도 자본의 논리를 극복케 해준다. 소수자를 위해 다수가 희생되는 미술판 구조 변화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즉 기존 아방가르드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인 ‘참여성’ ‘상호소통’의 문제를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로서 갱신하고 있는 것이다. 복제 방식은 예술의 비물질성을 가능케 하고 원작의 개념을 사라지게 하고 있다. 자본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보다 수월해지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안씨는 미술에서 소수 작가와 자본의 독점이 끝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한 사조가 100년을 못 넘긴 것처럼. 디지털시대의 예술은 인간중심으로 재편된다는 주장이다. 그는 인간과 작품이 중심이었던 19세기 민화에서 현대미술의 ‘현대성’을 상기해 볼 것을 권한다. 특정한 주도세력 없이 모두가 생산자이자 소비자였던 민화는 수공적이고 장인적 요소가 필요했다. 21세기 현대미술이 그렇게 가고 있다는 것이다.
글 편완식, 사진 김창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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