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이 격언은 사실 유클리드의 기하학에서 유래된다. 유클리드는 기원전 3세기의 고대 그리스 수학자로서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수학책으로 여겨지는 ‘기하학 원론’을 저술하였다. 열세 권으로 이루어진 이 방대한 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을 담은 고대 기하학의 결정체이다.
이 책은 천년 이상 기하학의 고전으로서 군림하며 ‘유클리드 기하학’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유클리드가 이 책을 쓴 후 이집트 왕의 가정교사가 되어 기하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왕의 기하학 공부가 쉬울 리가 없다. 어느 날 왕이 “기하학을 더 쉽게 빨리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유클리드는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설령 왕이라고 하더라도 기하학에 특별한 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똑같이 성실하게 노력하여 한걸음씩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기하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 영어공부, 바둑, 주식투자, 다이어트, 정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쉽고 빠른 길을 찾지만 유클리드의 교훈에 의하면 왕도는 없는 셈이다.
교수신문이 올해 병술년을 맞으며 우리 사회의 소망을 담은 사자성어로 ‘약팽소선 (若烹小鮮)’을 선정하였다. 이는 노자 60장에 나오는 ‘치대국약팽소선(治大國若烹小鮮)’에서처럼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굽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작은 생선을 요리할 때 자꾸 뒤집으면 살이 부서지고 먹을 것이 남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놔두고 잘 지켜보며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긴 기다림을 참지 못하는 우리의 조급한 성격과 경쟁이 가속되는 사회의 성과지상주의는 기회만 있으면 ‘왕도’를 찾게 되고, 이로 인한 병폐는 매우 크다. 1990년대 중반의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마찬가지로 작년 연말 이후 황우석 교수의 ‘사이언스 논문 조작 논란’은 우리 모두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과정의 진실성과 느림이 무시된 성과지상주의는 과학과 같이 ‘왕도가 없는’ 학문의 경우 조작과 과장이란 ‘골렘’을 불러낼 수 있다.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치며 벌거벗은 채로 밖으로 뛰어나온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아르키메데스. 그는 우연히 목욕탕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왕관의 순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과학은 이와 같이 ‘유레카’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유전의 기본단위를 발견한 요한 멘델은 8년 동안 3만 그루 이상의 콩을 심어 세대를 거쳐가며 숨은 유전적 특성들을 연구하여 ‘멘델의 법칙’을 찾아내었다.
대부분의 자연과학 분야의 경우 오랜 세월에 걸친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 그리고 좌절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숙성된다. 과학적 연구가 학문 이외의 목적으로 ‘왕도’를 찾을 때 ‘과학의 뒷골목’의 어둡고 부끄러운 면이 드러난다.
과학의 명암이 극명하게 교차하는 가운데, 존 호건의 ‘과학의 종말’에서와 같이 과학에 대한 회의론이 다시 제기되기도 한다. 과학의 핵심 문제는 이미 모두 답이 주어졌거나 너무 어려운 것은 아닌가. 이번 세기에도 대발견은 이어질 것인가.
그러나 저명한 사상가인 세네카의 말처럼 “자연은 그 비밀을 단번에 모두 드러내는 법은 없다.” 이번 세기에도 과학적 발견은 매우 느리게, 하지만 한걸음 한걸음 진행될 것이며, 이들이 모여 눈부신 과학혁명이 세기를 관통하여 이어질 것이다. 과학은 그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과학에는 왕도가 없다.’
김승환 포항공대 교수·물리학·아태이론물리센터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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