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돌풍=21일 공식 발표된 볼리비아 대선에서 ‘볼리비아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에보 모랄레스(46) 사회주의운동당 총재가 당선되면서 중남미 좌파 지도자는 7명으로 늘어났다. 54.3%의 득표율을 기록해 결선투표 없이 당선을 확정지었으며, 85%에 달한 투표율은 그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남미 좌파의 두 성향을 대표하는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에서는 우고 차베스 대통령과 노동운동 리더 출신의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이 각각 재선을 노리고 있다.
멕시코에서도 좌파 민주혁명당을 이끌고 있는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전 멕시코시티 시장이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칠레에서는 강력한 군 개혁을 주도했던 미첼레 바첼레트(54) 전 국방장관이 남미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유력하다. 11일 대선에서 45.9%의 득표로 과반을 넘지 못해 결선투표를 거쳐야 하지만, 2위와의 격차가 커서 당선이 무난할 것으로 전망된다. 내년 4월 대선을 치를 페루에서도 좌파 성향의 전 하원의원인 여성 민주투사 루데스 플로레스의 당선이 유력하다.
◆득세 원인=좌파 돌풍은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모델, ‘워싱턴 컨센서스’의 실패에 따른 반작용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잃어버린 10년’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금융위기를 겪은 중남미 각국은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이 제시한 처방에 따랐다.
그러나 심각한 양극화의 후유증 속에 아르헨티나 경제 파국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경제위기가 신자유주의 정책 탓이라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영국 BBC방송은 최근 전체 남미 인구 5억5000만명 중 2억2000만명이 빈곤층이며, 이 가운데 1억명은 하루 1달러 미만의 돈으로 생활하는 절대 빈곤층이라고 지적했다.
◆에너지 국유화 움직임=빈국들에게 에너지는 최대 밑천이다.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는 것도 미국 원유 수입량의 15%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인디오 출신의 코카 대농장주인 모랄레스는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국가통제권 강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외국 자본과 기득권층이 독식하는 에너지 산업을 국유화해 부족한 국가재정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볼리비아의 가스 매장량은 베네수엘라에 이어 남미 2위 규모.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최근 미 석유기업 엑손 모빌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 정부 주도의 ‘에너지 합작사업’에 참여할 뜻이 없으면 나가라는 것이다.
◆의미와 전망=미국은 지난달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미주정상회담에서 ‘반미 벨트’의 결속력을 실감하며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창설 협상 재개에 실패했다. 모랄레스의 집권은 중남미 좌파 단합을 더욱 가속화하고 중남미 국가공동체 추진 움직임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4개국 정상들은 내년 1월 브라질리아에서 회담을 갖고 좌파 정부 간 단결을 과시할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각종 스캔들에 휘말린 룰라 대통령의 재선이 불투명하고 좌파 정권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이견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좌파 이념으로 무장하고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정권이 중남미 전체 지역에서 큰 물줄기를 이루고 있으며,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앞으로 미국의 뒷마당에서 더욱 거센 저항에 부딪힐 것이란 점이다.
조현일 기자 conan@segye.com
<내년 대선 앞둔 중남미 9개국>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중남미 국가는 9개국에 이른다. 2003년 1월 노동운동의 리더인 실바가 브라질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뒤 남미에 레드벨트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내년 대선을 치를 각국의 현 정치 상황과 유력 후보들을 짚어본다.
◆브라질=실바 대통령은 지난 6월부터 각종 부정부패 스캔들에 휘말려 재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대 야당인 브라질 사회민주당(PSDB)의 주제 세하 상파울루시장이 집권 노동당(PT) 룰라 대통령에 맞서 결전을 치를 것으로 점쳐진다.
◆멕시코=중도좌파 제2야당인 민주혁명당(PRD) 소속으로 출마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전 멕시코시티 시장이 줄곧 1위를 달리고 있다. 집권 여당인 보수주의 색채의 국민행동당(PAN) 후보 펠리페 칼데론 전 에너지 장관이 그 뒤를 쫓으며, 제1야당이자 원내 제1당인 제도혁명당(PRI) 대선 후보 로베르토 마드라소 전 총재와 경합을 벌이고 있다.
◆콜롬비아=친미 강경 보수파로 평가받는 알바로 우리베 대통령이 최근 재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가운데 각종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율을 기록해 재집권 가능성이 높다.
◆페루=여당인 페루가능당의 헤아네테 엔마누엘과 야당인 대중기독당의 로데스 플로레스 등이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플로레스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
◆베네수엘라=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어렵지 않게 재선에 성공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토지 무상분배, 빈곤층 무상교육 확대 등 급진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빈곤층으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
◆에콰도르=루시오 구티에레스 전 대통령이 4월 의회에 의해 축출된 뒤 알프레도 팔라치오 현 대통령이 과도정부를 통치하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알프레도 현 대통령의 뒤를 이을 후보로 사회주의자인 레온 롤도스 아길레라가 강력히 거론되고 있다.
◆니카라과= 친미 성향의 엔리케 볼라노스 대통령이 반부패 정책을 추진하면서 정치적으로 고립된 가운데 아직까지 후보자를 내놓지 못한 가운데 반군 지도자 출신의 다니엘 오르테가 전 대통령이 우위를 지키고 있다. .
◆코스타리카=1986년부터 4년간 집권했던 오스카 아리아스 전 대통령이 재기를 노리고 있다. 국가자유당(NLP) 후보로 출마한 아리아스 전 대통령은 집권 여당인 사회기독연합당(PUSC) 시대를 종식하겠다는 계획이다.
◆아이티=지난해 2월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전 대통령이 축출된 이후 임시정부 체제로 통치되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 유엔 평화유지군 7600명이 주둔하고 있다. 조현일 기자 con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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