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김삿갓 김만희씨.
올해 나이 예순 하나.
30여년을 구름같이 부유하며
세상을 향해 쓴소리를
거침없이 토해내고 있다.
불의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해
싸워서라도 반드시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 그지만 방랑벽과 의협심 탓에
가정사만은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
아들 셋마저 생모 곁으로 보내고
정처없이 떠돌았다.
몇 해 전 그는 고향 마을 산 언저리에
움막 하나를 지었다.
충북 보은군 보은읍 종곡리 북산 자락의
두어 평짜리 공간이다.
컨테이너 외벽을 비닐과 판자조각으로
얼기설기 덮어
겨우 더위와 추위를 면하고 있다.
바람 같은 인생이 발걸음을
잠시 멈춰 쉬어 가는 곳이다.
다리품을 덜기 위해
그는 중고 승합차 한 대를 얻어
내부에 간이침대를 설치하고 전국을 누빈다.
간단한 취사도구만 뒤에 실으면
이동주택이다.
설악산에 머물면 설악호텔이요,
강가에 세우면 강변호텔이 된다.
구름도 쉬어 가듯 그는 움막에 들른다.
도포 자락과 괴나리봇짐을 벗어 던지고 그가 구성진 타령 한 곡조를 뽑아댄다. 그야말로 돈 있고 힘있는 자들을 향한 흥겨운 질타다. 붓을 든 손이 움직이자 이 시대를 풍자하는 시와 만화가 탄생한다. 국회나 대검찰청 앞에 들고 나가 높으신 양반들을 향해 “네 이놈들! 먹통들아 거듭나거라” 하고 일갈하기도 한다. 국회를 허물어 서울구치소 옆으로 옮기자며 쇠망치를 들고 철거 해프닝도 벌였다. 어찌 보면 무모한 것 같지만 그는 스스로 미친 짓을 자임한다. 가진 것 없으니 더 이상 뺏길 것 없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두려울 것이 없다. 그의 말처럼 깡통밖에 가진 것이 없는 몸, 깡통 차면 그만이다. 눈치볼 필요가 없다. 깡통 찼으니 맘놓고 하는 것이다. 무소유의 힘이다.
사람들은 때로 그의 이런 행동들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기 PR가 아니냐 오해하기도 한다. 정치적으로 연결해 자기편에 서달라는 요청도 있다. 비록 빈털터리 인생이지만 용납을 못 한다. 돈 되는 자리는 피하고 죽을 자리만 찾아드는 자신이 밉기도 하다. 성공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려고 사는 삶 같기도 하다. 천성이 그런 걸 어떻게 할 수도 없다. 자유당 시절 신익희 선생 지방유세에서 모두들 침묵하는데 혼자 일어나 열렬히 박수 쳐 빨갱이로 몰렸던 부친의 대쪽 같은 성격을 빼닮았다.
한때 기독교 목회자였던 그는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하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삿갓을 쓰고 다닌다. 하늘을 똑바로 바라보기엔 부끄러운 자신이다. 어쩌면 이 사회가 그를 고상한 자리에 머물지 못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한다. 불의를 보고 불의라 말하는 것도 복음이라고.
그의 유랑벽은 일찍이 시작됐다. 초등학교 시절 김삿갓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아 어느 날 가출을 결행한다. 그날 따라 첫 진눈깨비가 내려 산을 넘다 추위에 지쳐 중도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중학교 땐 만화가 그리고 싶어 집을 나와 자퇴하고, 지금은 고인이 된 방산시장의 신동우 화백 문하로 들어갔다. 김삿갓을 캐릭터로 삼았다. 20대엔 미아리 희망청년회를 이끌며 구두닦이 소년 등을 상대로 야학을 운영하기도 했다. 인물도 훤칠해 당시 ‘미아리 신성일’로 통했다.
역마살은 그래도 그의 곁을 끈질기게 지켰다. 이런 걸 팔자라고나 할까. 바람만 불어도,구름이 두둥실 떠가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지 않고는 못 견뎠다. 어느 겨울날 산천을 헤매다 정자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농가에서 콩깍지를 가져다 이불 삼아 덮고 잤다. 큰 비닐봉지 하나만 있으면 겨울에도 얼어죽지 않는 법을 터득했다. 낙엽 깔고 바위에 앉아 비닐봉지에 숨구멍만 내고 덮어쓰고 있으면 어떤 강추위도 이길 수 있다. 스스로를 노숙자라 칭하는 그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김삿갓이 노숙자의 원조라고 말한다. 그는 부쩍 늘고 있는 길거리 젊은 노숙자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마주앉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 동병상련에 자식 같은 생각에 마음이 짠하다. 사회를 원망하기보다 ‘너나 나나 이 모양에 문제가 있다’고 위로한다. |
마음의 문이 열리면 인생상담이 시작된다. 그는 몸과 마음이 병든 이들을 이 사회가 따듯한 가슴으로 안고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슴이 살아 있는 세상이 돼야 한다는 것.
한강 다리에서 어머니가 자식을 강물에 던져버린 소식을 듣고 그는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밤새 그 다리를 걷고 또 걸으며 대성통곡했다. 눈물이 한강물이 되어 가슴에 흘러 세상을 울리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여인의 정신이상으로 치부하며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우리 사회의 빨간 경고등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희로애락을 다 즐기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가슴이 살아 있는 인간이고 싶기 때문이다. 장편소설 ‘장외인간’을 펴낸 소설가 이외수씨가 연상된다. 삭막한 문명사회일수록 ‘감성’과 ‘낭만’을 잃어버리지 않은 인간형이 더 요구된다. 자연과 교감하고 우주와 조화하는 새로운 인간형을 말한다. 이외수씨가 “장외인간은 낭만을 기억하는 자”라고 했듯이.
그런 점에서 그는 장외인간이다. 우리 정신의 핵심인 풍류도에도 진정한 낭만이 깃들어 있다. 풍류도는 유·불·도교와 달리 예술을 도에 이르는 징검다리로 중시했다. 예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에 맞닿아 있다고 여긴다. 그가 풍속화와 민속벽화를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이유다.
그는 이제 진보와 보수, 우파와 좌파를 내세운 이권 간판들을 걷어치우고 동서남북 둥글게 둥글게 손에 손잡고 강강술래를 부르자고 제안한다. 친일파와 매국노 등의 ‘과거’ 참회와 용서도 그런 가운데 자연스럽게 ‘씻김굿’이 된다는 얘기다. 그는 이제부터 ‘싸움꾼’에서 벗어나 전국을 돌며 흥타령을 부르려 한다. 돈과 지식은 줄 수 없지만 신바람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흥이 있는 민족이니 흥만 살려주면 뭐든지 풀리게 마련. 서로 죽고 죽이는 죽음의 굿판을 이젠 걷어치울 때가 됐다는 주장이다.
애달픈 사연을 가진 자만이 진정 남을 웃게 할 수 있다. 쓴소리, 단소리를 마음껏 풀어내며 바람같이 산 그의 인생이 그렇다. 그는 삿갓 위에 감흥강국(感興强國)이라 썼다. 이 시대 김삿갓의 역할이라 했다. 심마니가 산삼을 캐듯 그는 기쁨을 캐려 한다. 그가 스스로를 김마니라 하는 연유다.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상투 틀고, 도포 입고, 죽장에 삿갓을 쓴 차림새만으로도 그는 웃음을 준다. 지나는 아이들은 맑은 눈동자를 마주치며 씩 웃는다. 사인 공세를 받는다는 점에선 대중 스타를 방불케 한다.
특이한 모양새로 그는 어느 곳에 들러도 밥 한술 대접받기가 손쉽다. 누구나 스스럼없이 반색한다. 깡통 찬 김삿갓이라며 맞장구를 치면 모두가 함박웃음이다. 베푸는 즐거움을 알게 하는 탁발승의 모습이다. 움막 그의 식탁엔 보리밥 한 사발과 그가 산에서 캐온 도라지와 야생 나물 서너 가지가 전부다. 그는 소박한 밥상을 고집한다. 넘쳐나는 시대엔 부족한 것이 웰빙이란다. 이른 아침 뒷산에 오른 그가 각종 새소리를 내며 새들과 대화를 나눈다. 혼자 살아도 심심치가 않다. 빠른 경보로 30분간 새벽 들판길을 가로지르는 것이 그의 건강 비결. 60대지만 20대의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믐날 밤 그가 으슥한 산길로 떠난다. 땅과 숲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진정한 내면의 소리가 거기에 있단다. wansik@segy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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