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면제도를 갖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뚜렷한 원칙 없이 기념일마다 사면을 남발하는 식으로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대륙법의 ‘원조’격인 독일은 지난 60년간 사면을 딱 4차례 단행했다.
법치주의가 확고히 자리잡고 국민들의 준법정신도 강해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면·복권 등이 시행되지 않는 것이다. 헌법·법률을 해석하는 최고 권위를 지닌 연방헌법재판소는 판례에서 “사면은 법률의 획일성이나 경직성, 수사 과정의 오류를 시정하기 위해서만 실시할 수 있다”고 밝혔다. 프랑스도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를 엄격히 제한한다.
특히 국가와 사회의 기본가치를 침해한 범법자들에 대해선 사면·복권이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다. 부정부패 공직자와 선거법 위반 사범, 테러와 정치적 차별을 저지른 사람, 15세 미만 미성년자를 때린 폭행범, 마약·밀수 사범, 불법낙태 사범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핀란드는 헌법에 “대통령은 특별한 경우 대법원에 자문해 사면해야 한다”는 조항을 뒀다. 사법부가 내린 유죄 판결이 ‘정치적 타협’에 의해 무시되는 폐단을 막기 위한 조치다. 덴마크는 행정부 각료를 지낸 인사에 대해선 사면이 금지돼 있다. 재직 당시의 권력이 컸던 만큼 퇴임 이후의 특혜는 없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양원제 국가인 노르웨이에선 하원에 의해 소추된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면 대상이 될 수 없다. 일본은 사면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쟁생보호심사회’란 기구를 법무부에 두고 있다. 사면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우선 심사위에 신청해야 한다. 심사위는 이렇게 신청받은 개별 사안들을 일일이 심사해 ‘사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만 추려내 그 명단을 법무부에 전달한다.
일본에선 사면을 신청할 수 있는 요건 또한 까다롭다. 벌금형을 선고받은 경우 판결 확정일로부터 1년, 징역 및 금고형은 형기의 3분의 1이 각각 지난 다음에야 사면 신청이 가능하다. 대법원의 형 확정일로부터 6개월 만에 사면된 강금원 전 창신섬유 회장 같은 사례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다양한 사면제도를 갖고 있다.
국가 헌정질서에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실시하는 ‘조건부 사면’, 검찰에 기소되기 전 수사 단계에서 이뤄지는 ‘기소전 사면’,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흔히 시행되는 사면과 비슷한 ‘기소 후 사면’ 등이 있다. 기본적으로 사면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권한이지만 입법부인 의회도 특별법 성격을 띤 사면법을 만들 수 있다. 기소 후 사면 절차는 비교적 까다롭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법무부에 설치된 사면국이 사면 희망자들의 청원을 접수해 면밀히 심사한다. 필요할 경우 사건을 담당한 검사와 판사의 의견을 듣기도 한다. 사면국장이 개별 청원의 수락 또는 거부를 권고하는 보고서를 작성해 대통령에게 제출하면, 대통령이 최종 결정을 내린다.
청원 남용을 막기 위해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석방 이후 5년, 실형을 제외한 유죄판결의 경우 형 확정일로부터 5년이 지난 다음에야 청원서를 낼 수 있도록 법제화했다. 기소 전 사면은 다소 예외적인 경우다. 1974년 포드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전임 닉슨 대통령에 대해 실시한 사면이 대표적인 사례다. 포드가 닉슨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인물이란 점에서 ‘정치적 거래’란 비판을 받았다.
조건부 사면의 대표적 사례는 19세기 남북전쟁 이후 단행된 대사면이다. 링컨 대통령과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국민화합을 명분으로 ‘남부연합’(남북전쟁 당시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남부 주들끼리 연합해 세운 국가)에 부역한 공무원·군인을 상대로 실시한 것인데, 이는 충성맹세를 조건으로 한 사면이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부적절한 사면권 행사로는 클린턴 대통령의 사례가 꼽힌다.
2001년 1월 자신의 임기 종료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조세포탈 등 혐의로 기소된 뒤 스위스로 도피한 기업인 마크 리치를 전격 사면한 것이다. 훗날 리치가 민주당에 100만달러 이상의 선거자금을 기부한 사실이 드러나 검찰이 클린턴을 상대로 사면의 대가성을 조사하기도 했다.
사회부 특별취재팀=채희창·이천종·김귀수·김태훈·강구열·신미연·오승재 기자,
전산팀〉이명규 팀장 cjordan@segye.com
"바뀌면 손해…” 정치권 개정의지 실종 사면법 1948년 제정이후 ''노터치''
1948년 제정된 사면법이 한번도 개정되지 않아 ‘시대에 뒤떨어진 법’이란 지적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권에 폭넓게 형성된 ‘이심전심’ 문화가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권위주의 정권 때는 만연한 각종 비리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만큼 대통령이 여야 균형을 맞춰 가며 행사하는 정치인 ‘면죄부’ 주기에 굳이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또 권위주의 시대가 가고 개혁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사면법은 여전히 개혁에서 ‘예외’였다. 사정의 우선 대상인 정치인들로선 자신에게 돌아올지 모를 ‘혜택’의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이와 함께 사면은 통치권자 입장에서 보면 국정 장악력 또는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확대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역대 정권이 내건 사면의 명분은 ‘국민 화합’이었지만 정국 돌파를 위한 분위기 쇄신용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통령으로선 포기하기 어려운 특권이다. 김상겸 동국대 법대 교수는 “사면법 개정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현실적 필요성으로 인해 정치권에서는 누구도 적극적으로 개정을 주장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고, 권해수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각종 비리에 연루돼 서로 빼내야 할 사람이 있는 정치권에 사면권 개정은 아킬레스건”이라고 진단했다.
김종철 연세대 법대 교수는 “사면권은 은사권이라고 생각해서 국가원수가 행하는 일정한 재량권에 대해 국회가 깊이 생각지 않았던 게 사실”이라며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문제 삼을 용기가 없었고, 민주화된 이후에는 사면권 개정의 의지가 없었다”고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강기탁 사무차장은 “여야 구분 없이 정치인들이 비리에 연루돼 있는 만큼 정치권은 대통령의 사면권에 대해 똑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고 권력자의 의지 실종 때문이라는 지적도 잇따랐다. 최원호 변호사는 “독재권력을 거치면서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마당에 거의 백지위임 상태와 마찬가지인 사면권을 대통령이 스스로 거둘 필요가 있었겠느냐”고 했고, 설창일 변호사도 “대통령의 권한이 어느 나라보다 강해 대통령 본인의 의지가 아니고서는 사면권을 개정할 여지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재경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과거 절대적인 힘을 가진 대통령에게 대항할 수 없었던 우리 정치의 한계라고 진단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