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그가 일이 있어 금화(金華)에 갔다가 성의 북쪽에 있는 어떤 절에 여장을 풀었다. 절 안의 전각과 탑들은 매우 크고 화려했지만, 쑥대가 사람 키보다 높게 자라난 풍경으로 보아 오랫동안 인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동서로 가로놓인 승방에도 쌍빗장이 시늉으로만 걸려 있을 뿐이었다. 다만 남쪽에 있는 작은 건물은 최근에 빗장이 질린 것 같았다. 다시 불전의 동쪽 모퉁이를 살펴보니 아귀에 꽉 찰 듯한 굵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고, 계단 아래의 커다란 연못에는 야생 토란이 꽃을 피우는 참이었다. 영채신은 이곳의 고요하고 그윽한 정경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마침 학사안림(學使案臨 역주) 때문에 금화성 안은 방값이 급등했으므로 그는 이 절에서 묵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그는 절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날이 저물자 어떤 서생이 나타나 남문의 빗장을 열었다. 영채신은 황급히 달려가 그에게 인사하면서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는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이곳은 주인 없는 절입니다. 저 역시 여행하던 중 임시로 머물고 있는 처지니까요. 이렇게 황량하고 썰렁한 절집이라도 계시겠다면 저 또한 가까이 뵈면서 가르침을 청할 수 있을 테니, 제게도 잘된 일이지요.”
영채신은 서생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짚을 깔아 침대로 삼고 판자를 엮어 책상을 만들면서 이곳에 장기간 머무를 작정을 했다.
그날 밤은 달이 무척 밝았다. 맑은 달빛이 물처럼 흐르는 가운데 두 사람은 불전의 낭하에 무릎을 마주하고 앉아 통성명을 했다. 서생은 자기를 일러, “연씨(燕氏) 성에 자는 적하(赤霞)”라고 소개했다. 영채신은 그가 시험을 치러 온 수재가 아닌가 추측했지만 말투를 들어보니 절강 사람의 말씨와는 전혀 달랐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저는 섬서 사람입니다” 하는 대답이었다. 서생의 말투는 더없이 소박하고 성실했다. 이윽고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자 서로 인사한 다음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영채신은 잠자리가 낯설어 오래도록 뒤척이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처소의 북쪽으로부터 마치 인가라도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몸을 일으켜 북쪽으로 난 석창(石窓) 아래로 간 다음 살그머니 바깥을 넘겨다보았다. 그러자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작은 집 한 채가 보이면서 마흔 살이 좀 넘은 듯한 부인네 한 사람도 눈에 들어왔다. 또 색깔이 바랜 붉은 옷을 입고 커다란 은비녀를 꽂은 할미도 한 사람 있었는데, 그녀는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힌 채 달빛 아래에서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천이가 왜 이렇게 오래 나타나지 않을까요?”
부인의 푸념에 할미가 응수했다.
“올 때가 거진 되었어.”
“할머님께 무슨 원망하는 말이나 하지 않았어요?”
“그런 소리는 못 들었어. 그러나 기분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더구나.”
“이 계집애에게 너무 끌려가면 안 되겠어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일곱여덟 살가량의 아가씨가 걸어왔는데 세상에 둘도 없는 절세미인이었다. 할미가 웃으면서 말했다.
“본인이 없는 데서 그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더니. 우리 두 사람이 마침 너에 관해 얘기하던 참인데, 우리 귀여운 애기씨가 소리도 없이 살그머니 왔구먼. 다행히 네 욕을 안했으니 망정이지.”
이어서 할미는 또 이렇게 여자를 치켜세웠다.
“애기씨는 정말 그림 같은 미인이야. 만약 내가 남자라도 너 때문에 혼이 나갔을걸.”
그 말에 여자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할머님, 그만 치켜올리세요. 누가 저 같은 사람을 좋다고나 한대요?”
부인과 여자가 또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영채신은 그들이 이웃집 사람들인 줄 알고 잠자리에 들면서 더 이상 엿듣는 일을 그만두었다. 다시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사방은 조용해지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가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누군가 방 안에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황급히 일어나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북쪽 집에 있었던 그 여자였다. 영채신이 당황하면서 무슨 짓이냐고 묻자, 여자가 웃으며 응수했다.
“달빛이 너무 좋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겠어요. 당신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네요.”
그 말에 영채신은 정색을 하면서 꾸짖었다.
“남들의 입길에 오르고 싶소? 나 또한 다른 이의 한가한 말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오. 자칫 한번 실수로 염치와 도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싶은 거요?”
“한밤중인데 누가 알겠어요?”
그러나 영채신은 다시 그녀를 꾸짖었다. 여자는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뭔가 할말이 있는 듯하였다. 영채신이 소리를 지르며, “어서 가시오. 그러지 않으면 고함을 질러 남쪽 방의 선비를 깨우겠소”라고 위협하자, 여자는 겁에 질려 그제야 물러갔다. 하지만 방문 밖으로 나갔다가 금방 되돌아오더니 황금 한 덩어리를 이불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영채신은 금덩이를 주워 정원 층계로 내던지며 말했다.
“의롭지 않은 재물로 내 호주머니를 더럽히려 들다니!”
여자는 부끄러워하면서 밖으로 나가더니 황금을 주워 들고 혼잣말을 했다.
“이 남자 심장은 쇠나 돌로 만들어졌나 봐.”
이튿날 아침, 시험에 참가하려던 난계현(蘭溪縣) 출신의 서생이 하인 한 명을 데리고 와 동쪽의 승방에 묵었다가 한밤중에 갑자기 죽어버렸다. 죽은 사람은 발바닥 한가운데에 송곳으로 찌른 듯한 작은 구멍이 나 있었는데, 거기서 피가 가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두들 그가 왜 죽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날 밤이 지나자 하인도 죽었는데, 증상이 그 주인과 똑같았다. 어둑해질 무렵 연생이 돌아왔기에 영채신이 그 일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귀신에 홀렸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영채신은 평소 성격이 굳세고 올곧았기 때문에 연생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한밤중이 되자 여자가 다시 영채신을 찾아와 말했다.
“저는 여러 사람을 겪어보았으나 당신만큼 심지가 굳은 이는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정말 성현처럼 인품이 훌륭하시기 때문에 제가 감히 속이거나 유혹할 수가 없군요. 저의 이름은 소천이고 성은 섭씨입니다. 열여덟 살로 요절하는 바람에 이 절 근처에 매장되었는데, 요물의 협박 때문에 이런 더러운 일을 하게 되었지요. 낯가죽을 두껍게 하고 사람을 유인하지만, 이는 실로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제는 절 안에 죽일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야차가 와서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영채신이 그 말에 매우 놀라면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자, 여자가 말했다.
“연생과 한방을 쓰면 재앙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째서 연생은 유혹하지 않는 거요?”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서 감히 접근할 수 없답니다.”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홀리시오?”
“저를 희롱하고 관계를 갖는 사람에게는 제가 몰래 송곳으로 발바닥을 찌릅니다. 그의 정신이 혼미해져 인사불성이 되면 그 틈에 피를 뽑아 요괴들에게 먹도록 하지요. 때론 황금으로도 유혹하는데 사실은 금덩이가 아니고 나찰(羅刹) 귀신의 뼈다귀여서 누구든지 그걸 갖게 되면 뼈다귀가 그 사람의 심장과 간을 도려낸답니다. 이 두 가지는 목표로 삼은 사람의 기호에 따라 그때그때 적당한 것으로 골라 사용하지요.”
<다음주 계속>
중국의 4대기서는 모두들 알고 계시지요? 이는 명나라 때 출판된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를 일컫는데, 중국에서는 청나라 시절의 4대기서인 ‘요재지이’ ‘홍루몽’ ‘유림외사’ ‘금고기관’을 합쳐서 8대기서라고들 부릅니다.
다른 책들이 모두 장편소설이고 중국인의 구어체인 백화(白話)로 기술되어 있는 데 반해 ‘요재지이’만은 대단히 난삽하고 격조 있는 문언(文言)으로 씌어 있지요. 거기다 본문 곳곳에 시, 사(詞), 사부(辭賦), 변려문이나 팔고문으로 씌어진 의론문과 판결문, 구어와 속어가 어우러진 대화들이 삽입되어 있어 중국 언어예술의 최고봉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최고의 지식인 문학으로 군림해 왔다는 말이지요.
이런 고급한 문체 때문에 읽기가 어렵다보니 중국에서도 원문을 그대로 읽는 경우는 전공자나 마니아들 말고는 드물고, 대부분 백화번역본으로 대신하거나 다른 장르의 예술로 변환된 이야기들을 즐기고 있습니다. 덕분에 영화나 TV 드라마, 설창(說唱), 만화, 동화, 회화, 소설 등 거의 모든 예술 장르에서 이 책의 스토리는 끊임없이 응용되며 지금도 재생산되고 있지요.
이미 세상을 떠난 장국영과 너무나 늘씬했던 미녀 왕조현이 주연했던 영화 ‘천녀유혼’을 기억하시는지요?
그 영화의 원작이 이 책에 들어 있는 ‘섭소천’이란 이야기입니다. 원래는 비교적 단순한 단편소설인데 서극 감독이 거기에 살을 붙이고 변환을 가해 스펙터클한 판타지 영화로 탈바꿈시킨 것이지요. 앞으로 3회에 걸쳐 그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고졸한 맛의 원문이 어떤 상상과 기술의 힘으로 그 같은 영화로 바뀌었는지 비교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김혜경/한밭대 어문학부 교수
■역주
학사안림(學使案臨):학사는 공부를 독려하는 사자. 학정(學政)을 감찰했기 때문에 ‘학정’이라고도 부른다. 과거 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각 성에 학정을 감찰하는 관리를 파견했고, 각 성의 학사는 3년의 임기 동안 관할 각 부(府)를 돌며 생원 시험을 보았는데, 이를 ‘안림’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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