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고야의 한 외진 곳에서 섬유 짜는 기계를 만들어내던 회사가 자동차 제작에 도전했다. 1936년 모델AA 승용차를 처음 만든 뒤 환호했다. 1950년대 중반에 미국시장에 덤볐다. 수출용으로 들고 갔던 자동차가 미국 고속도로에서 비실거렸다. 기술진은 쓰라린 패배감에 좌절했다. 이를 악물었다. 3대에 걸친 가족 사업은 드디어 2008년 세계 정상에 올랐다. 일본 역사책에 잉크로 쿡쿡 찍어 신화를 기록한 이 주인공들은 바로 일본 도요다 패밀리이다. 하지만 기쁨은 찰나에 불과했다. 세계 제패에 매달렸던 이들은 이제 생존문제에 직면했다. 1937년 설립된 도요타 자동차가 창립 73년 만에, 첫 자동차를 만든 지 74년 만에 부닥친 위기는 도요다 아키오(豊田章男) 사장을 미국 청문회에 밀어넣었다. 도요다 사장은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으로 부상한 중국에까지 날아가 소비자 신뢰 회복에 노력했으나 시장의 반응은 아직 냉랭하다. 도요타가 창립 이후 겪었던 위기와 극복과정을 살펴본다.
도요타는 이 첫번째 위기를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했다. 중일 전쟁이라는 외부 요인이 도요타를 구제했다. 전시체제로 돌입한 일본 육군은 도요타의 트럭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전쟁 특수로 인해 재고 트럭이 금방 바닥이 났고, 회사는 기사회생했다.
전쟁터에서 사이즈에 맞지 않는 부품으로 트럭 고장수리를 해주느라 고생했던 도요타는 자체적으로 부품 표준기준을 만들었다. 미국의 자동차 업체가 일본에 들어가 사용하던 야드와 파운드법을 미터법으로 완전히 교체했다. 자동차 나사규격 등 도요타가 결정한 규격은 나중에 일본의 표준 규격으로 채택됐다.
도요타는 매일매일 필요한 만큼 부품을 생산해 조립하는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기법을 도입해 생산성을 올렸다. 일본이 2차대전을 일으켰을 때 도요타 자동차는 육군의 연습기용 9기통 엔진 등 비행기용 엔진을 제작하기도 했다. 독일군이 개발한 제트기의 엔진을 복제하기 위해 도면원본을 독일로부터 잠수함으로 실어 나르기도 했다. 사륜구동의 수륙양용차도 만들었다. 전쟁이 도요타를 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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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콜로라도주 레이크우드의 한 도요타 딜러에 캠리 등이 줄지어 서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자동차와 판매부문을 분리하는 조건으로 일본은행으로부터 겨우 구제금융을 받았다. 하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에이지는 미국에 건너가 포드와 제휴교섭을 벌였다. 자신의 여권을 본 그는 놀랐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명령○○호에 의거한 일본인’이라고 적혀 있었고, 인종란에는 ‘몽골리안’으로 돼 있었다. 패전국 기술자인 그는 감시의 눈길과 차별대우를 느꼈다고 한다.
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포드는 하루 8000대를 생산했다. 당시 도요타의 생산량은 40대에 불과했다.
사망선고를 받아놓은 것이나 다름없던 도요타를 살린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미군으로부터 트럭 주문이 쏟아졌다. 미국에서 트럭을 실어나르던 미군이 상황이 급박해지자 일본에서 트럭을 조달키로 한 것이다. 도요타는 1950년 파업과 감원 등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손익분기점을 맞췄다. 에이지는 “도요타는 한국전쟁 특수 덕분에 기반을 잡았다”고 고백했다.
미군의 트럭 주문은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1962년까지 10년 이상 계속 됐다. 미군은 처음에는 한국에서 쓰기 위해 일본 트럭을 구매했지만 나중에는 필리핀과 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 군사원조라는 이름으로 트럭을 공급했다. 미군의 이 같은 주문은 일본의 자동차 메이커들에게 큰 이익을 안겨줬고, 미국의 씨티뱅크는 이 특수를 겨냥해 도요타가 있는 나고야에 일부러 지점을 개설했을 정도였다.
미 정부는 1962년 의회에서 “미군은 미국산 트럭을 구매해야 한다”는 법이 통과되자 일본 트럭 구매를 중단했다.
도요타는 전쟁특수를 누리면서 대중 승용차와 소형트럭 개발에 몰두했다. 1955년 신형차 크라운을 발표했다. 왕세자가 도요타 공장을 방문하고 나중에는 일왕과 왕후가 방문할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도요타는 1957년 10월 미국 도요타를 설립하면서 국제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엔진의 출력이 떨어져 미국 고속도로에서 제대로 주행할 수 없었다.
도요타 연구진은 필사적으로 출력을 올리는 실험에 매달렸다. 에이지는 “하루라도 빨리 제대로 된 승용차를 수출하지 않는 한 미국 도요타는 문을 닫을 운명이었다”고 회고했다. 문자 그대로 배수의 진을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미국 도요타가 기울기 시작해 인원 정리와 함께 규모를 대폭 축소했다.
크라운의 대미 수출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지만 일본 내에서는 택시를 중심으로 한 영업용 자동차와 일반 기업에서 수요가 늘어나 숨통이 틔었다. 도요타는 이때 월 5000대 규모의 생산이 가능한 새 공장을 건립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도쿄 올림픽이 열린 다음해인 1965년 이후 일본의 자동차 대중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1966년 신화에 비유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코롤라’를 출시했다. 경쟁사 닛산자동차의 ‘서니(배기량 1000cc)’보다 배기량이 100cc 더 높은 코롤라는 1967년 한해에만 무려 16만대가 판매됐다. 이 코롤라의 명성으로 도요타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됐다.
◆3차위기=2001년 ‘글로벌 10’(세계자동차 시장의 10% 점유) 목표를 달성한 도요타는 2010년까지 세계 자동차 시장의 15%를 차지하겠다는 타깃을 설정했다.
하지만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미국 미시시피주 블루스프링스에 건설키로 한 공장설립을 중단했다. 미시시피주 투펠로의 새로운 생산공장도 완공되지 못하고 중단됐다. 캘리포니아주 프레몬트에 있는 GM과의 합작공장은 문을 닫았다.
도요타는 지난해 5월 연간순손실 44억달러를 기록한 뒤 정부에 긴급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손을 벌렸다.
여기다가 전 세계적으로 860만여대에 달하는 올해 리콜사태로 20억달러의 손실이 예상된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도요다 아키오 사장이 도요타 자동차만 대리하는 게 아니라 일본의 얼굴이라면서 도요타가 받은 타격은 국가 이미지의 타격이고 그 충격은 너무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해석했다. 도요다 사장은 지난달 24일 미국에 이어 5일 일본에서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도요타 신화의 산증인 에이지는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너무 잘 나가면 미국 자동차 업계에서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자동차를 판매하는 상황에서는 무역 마찰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며 미국과의 갈등을 예상했다. 그는 또 “자동차 기업은 한번 손실을 보기 시작하면 당장 수렁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만다”고 예언했다.
그의 예언대로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도요타가 전쟁특수가 없는 상황에서 이번에는 어떤 묘책으로 위기를 넘길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한용걸 기자 icykar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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