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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대한민국 출발점 제헌국회, 영욕으로 점철

입력 : 2008-01-01 11:23:11 수정 : 2008-01-01 11: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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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억압 벗어나 민주주의 국가로.. 100일도 안걸려 ‘새 나라’ 건설 완성
北 뺀 ‘반쪽총선’으로 남북분단 고착.. 이승만 제지로 친일파 처단 ‘물거품’









◇제헌국회는 새 나라 ‘대한민국’을 세웠지만 ‘남북분단 제도화’와 ‘민족반역자 처단 실패’라는 부정적 유산도 남겼다. 사진은 1948년 5월31일 제헌국회 개원식 모습.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피시사…(중략)… 원컨대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1948년 5월31일 오후 2시 제헌국회 개원식장(옛 중앙청 회의실). 목사 출신 이윤영 의원의 기도가 식장을 울렸다. 기독교 신자인 이승만 임시의장의 예정에 없는 요청이었다. 제헌국회는 이렇게 기도로 그 역사적 문을 열었다.



기도가 말해주듯 당시 한반도 정국은 ‘해방의 기쁨’이 ‘분단의 좌절’로 뒤바뀌는 상황이었다.



민족정기를 되찾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 제헌국회의 임무는 막중했다. 이름대로 헌법을 제정했고 대통령을 선출했다. 근대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일제에 적극 협력한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단하는 데 실패했다. 남북분단도 제헌국회 구성을 계기로 제도화, 고착화했다. 이 같은 부정적 유산은 60년이 지나도록 민족의 화합과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남아 있다.



#새 나라를 만들다



1948년 5월10일 총선거→5월31일 제헌국회 개원→7월1일 대한민국 국호 제정→7월17일 헌법 공포→7월20일 이승만 대통령, 이시영 부통령 선출→8월15일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제헌국회가 ‘새 나라’를 만드는 작업은 100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당초 헌법 초안의 권력형태는 의원내각제였다. 그러나 이승만 국회의장의 고집으로 하룻밤 새 대통령중심제로 바뀌었다. 이승만 국회의장은 대통령제를 택할 경우 초대 대통령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던 고(故) 윤길중 전 의원은 “제헌 당시 한 사람의 고집으로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했던 것이 그후 우리 헌정사에서 독재, 장기집권, 정통성 등의 시비가 끊임없이 제기된 원인이 됐다”고 평한 바 있다. 제헌국회는 헌법 외에 국가보안법, 지방자치법, 반민족행위처벌법, 미국 주둔에 관한 결의안 등을 만들었다.



#남북분단의 제도화



제헌국회 의원을 선출하는 ‘반쪽짜리’ 총선거가 시발이었다. 좌우정치세력의 대립과 남북을 분할 점령하던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 탓에 통일국가 수립의 민족적 염원은 끝내 무산됐다. 결국 1947년 9월 2차 미소공동위가 결렬되고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면서 남한 단독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이 현실화했다.



단독선거에 대해 이승만과 친일경력 인사가 대거 참여한 한민당 세력은 적극 찬성했다.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세력과 김구 김규식 선생 등 민족주의 진영은 반대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1948년 5·10 총선에서 북측 의석 100석은 남겨둔 채 임기 2년의 제헌의원 198명을 선출, 우익 중심의 ‘반쪽 국회’가 출범했다. 제헌국회 속기록 머리말엔 “제헌국회의원 선거는 남한 최초의 자유보통선거라는 의미와 함께 남북분단을 제도화한 부정적 의미도 들어 있다”고 기록돼 있다.



반쪽 국회엔 매카시즘(극단적 반공주의)이 판쳤다.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이 대표적이다. 수사당국에 따르면 남로당 프락치(공작원)로 제헌국회에 침투, 첩보공작을 한 혐의로 김약수 부의장 등 의원 13명이 체포된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김인식(95) 전 제헌의원은 ‘왜곡’의 대표적 사건으로 이 사건을 꼽았다. “반공주의자 아니면 당선이 안 되던 시절이야. 한민당에서 무소속이나 다른 당 의원들이 말을 안 들으니까 만들어낸 사건이지.” 김 전 의원은 수년 전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실패한 반민족행위자 처단



“우리 헌법 101조에는 이 국회는 단기 4278년(서기 1945년) 8월15일 이전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가 있다고 그랬습니다.(중략) 우리나라 조선사람으로서 일본놈 행세를 하며 악질적으로 모리하던 사람이 해방 후 조금도 과오를 느끼지 않고 마찬가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저는 많이 보고 있읍니다….”(제헌국회 속기록)



1948년 8월5일 김웅진 의원은 이렇게 운을 뗀 뒤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의 시급한 제정을 촉구했다. 김 의원의 발의로 시동 걸린 친일세력 처단 논의는 9월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으로 결실을 맺었다. 10월1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돼 마침내 반민족행위자 처단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미 권력 전면에 포진한 친일세력과 비호세력은 가만히 당하지 않았다. 반민특위를 힘으로 무너뜨렸고 반민족행위자 처단은 무산되고 말았다.



비호세력의 정점엔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다. 그는 친일파 경찰간부들이 체포될 단계에 이르자, 1949년 6월6일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 소속 특경대를 강제해산시켰다. 반민특위 부위원장을 지낸 고 김상돈 전 의원이 1957년 종합실화잡지 ‘진상(眞相)’ 12월호에 기고한 ‘반민특위 습격일 회고담’을 보면 이 대통령의 ‘입장과 역할’이 드러난다.



회고담에서 김 전 의원은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 위원들과의 대담을 원해 만나보니 ‘노덕술(고문기술자로 유명한 친일 경찰)은 유능한 기술자이니 석방하라’고 요청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썼다. 회고담에 따르면 그는 이 대통령에게 “(노덕술은) 악질적인 반민족 행동의 경험뿐인데 신생 대한민국에 그러한 경험의 기술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고 답했고 이 대통령은 “이제 내 맘대로 하겠다”며 화를 내고 돌아갔다.



이어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무장한 경찰 수십명을 대동하고 을지로입구 반민특위본부에 나타나 특경대원들을 개처럼 끌고 갔다. 그는 “그 결과 살아난 것은 악질 친일분자들이고 울분을 풀지 못한 것은 온 민족이었다”고 탄식했다.



류순열 기자 ryoo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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