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게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많더라
나는 그다지 좋은 아빠가 아니라서, 사춘기 아들을 차에 태워 학원에라도 데려다주려면 차 속에선 묘한 긴장감이 흐르곤 한다. 아들 입에서 나오는 가장 흔한 한마디는 “저 그냥 이어폰 끼고 음악 들어도 되죠?”가 일쑤였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던 어느 날, 안 되겠다 싶어서 “그러지 말고 네가 듣고 싶은 음악 틀어봐”라고 제안했다. 아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차에 연결된 내 스마트폰을 집더니 노래를 골랐다. 곧이어 재생된 노래는 ‘Hello Mr. My Yesterday’라는 곡. 제목은 영어인데 노래는 한국어다. 무슨 노래인지 물어보니까 꾹 닫혀만 있던 아들의 입에서 봇물처럼 얘기가 터져 나왔다. 애쉬그레이라는 가수의 노래인데 원곡은 ‘명탐정 코난’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주제가라고. 다음 곡부터는 아예 일본어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애니메이션 주제가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는 별말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영 걱정이 됐다. 우리 애가 별나서 일본 만화 주제가나 듣고 있는 걸까. 이 또래 아이들은 케이팝을 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 우리는 ‘튀지 말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살아온 세대라 온갖 걱정스러운 마음에 일본 노래가 과연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도 유행인지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행 정도가 아니었다.
오늘날 일본 애니메이션 주제가는 ‘애니송’(アニソン)이라는 별도의 장르가 되어 마치 케이팝처럼 글로벌한 성공을 거두는 중이었다. 달라진 건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넷플릭스 같은 새로운 플랫폼의 존재. 마치 케이팝이 이런 플랫폼에 올라타 세계를 휩쓴 것처럼, 동해 건너편의 애니송도 플랫폼의 힘을 빌려 세계를 휩쓸었다.
예를 들어 이 분야의 대표적인 스타는 ‘귀멸의 칼날’, ‘나 혼자만 레벨업’ 같은 인기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를 부른 일본 가수 리사인데 올해 6월 그녀가 뉴욕과 LA, 멕시코시티에서 연 첫 북미 투어는 전 좌석이 매진되며 대성공을 거뒀다. 아들도 들어보라며 추천했던 요아소비라는 밴드가 부른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 주제곡 ‘아이돌’은 빌보드차트 7위에 올랐고, 유튜브 조회 수는 6억 회가 넘는다고 한다.
글로벌 플랫폼 덕분에 하루아침에 벼락스타가 생겨나는 일은 사실 세계 각국의 공통된 현상이다. 하지만 케이팝이나 애니송처럼 하나의 장르가 되어 글로벌한 인기를 끄는 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다양한 분석이 이미 나와 있다. 한국의 케이팝은 대형 자본이 어린 학생들을 ‘연습생’으로 몇 년간 훈련시켜 완벽하게 상품으로 다듬어 출시하는 시스템 덕분에 성공했다거나, 일본의 애니송은 넷플릭스와 크런치롤 같은 세계적인 스트리밍 서비스 덕분에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글로벌하게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덕을 봤다는 식이다.
하지만 내게는 팬들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예를 들어 중동지역 케이팝 콘서트 영상을 보면 대부분의 팬이 히잡을 쓴 여성들이다. 미국에서 열렸던 리사의 콘서트 영상 속 팬들의 상당수도 아시아계와 중남미계였다. 가부장적 사회로 유명한 지역의 여성들, 백인 중심 사회의 소수인종들, 아마 이들도 처음에는 주변에서 똑같은 질문을 수백 번씩 받았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걸 즐겨?” 그러다가 불현듯 깨달았을 것이다. 나만 혼자서 별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세상에 나 같은 사람들이 수백만 명, 수천만 명, 아니 수억 명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별나고 이상한 건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별나다고 몰아붙였던 그 사람들이란 사실을.
김상훈 실버라이닝솔루션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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