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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 빠진 '영재'… "꿈 확고하니 공부가 다시 즐거워" [궤도밖 나의 길]

입력 : 2018-12-03 03:00:00 수정 : 2018-12-02 21: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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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때 ‘웨어러블 특허’ 대학생 이찬중 / 9세부터 과고 준비 ‘사교육 키즈’/ 20살에 게임업계 현실 벽 실감 / 꿈, 늦어도 확실한 방향 중요
나이를 묻지 않고 만났다면 기자와 비슷한 30대 중반과의 대화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서강대 아트앤테크놀로지전공 1학년 이찬중(21)씨가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에서 국내 게임산업과 획일적인 교육 시스템, 본인의 꿈에 대해 조목조목 풀어내는 수준은 갓 스물을 넘긴 대학생답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과학고 입시를 준비한 ‘사교육 키즈’였던 그는 사춘기 시절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대신 게임과 가상현실(VR)에 빠져 ‘한국학생가상현실학회’를 조직했고, 이어 웨어러블 특허를 출원했다. 2015년에는 대한민국 인재상도 받았다. ‘궤도 밖 나의 길’ 두 번째 주인공으로 이씨를 만났다. 2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미국 블리자드 본사와 블리즈컨 2018을 다녀온 참이라고 했다.


이찬중씨가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HMD: 머리에 쓰고 가상현실을 체험할 수 있는 장비)를 들고 웃고 있다. 건강한 미디어 생태계를 만드는 게 이씨의 꿈이다.
이제원 기자
◆게임에 빠진 엄친아

이씨가 자란 대전 둔산동은 ‘대전의 대치동’이라 불릴 만큼 교육열이 남다른 곳이었다. 구구단을 배울 나이에 과학고 입시 준비 학원에 다니고 올림피아드반, 영재교육원 등 최상위 코스만 밟았다. 누가 봐도 ‘엄친아’였던 그는 사춘기가 돼 진로를 급하게 전환한다.

“영재교육원을 서너 군데 다녔어요. 대학교 물리 수준의 선행교육을 받았는데 수식에 갇혀 사는 느낌이 들면서 흥미가 떨어지더라고요. 교육원에서 버티는 것도 힘든데 이걸 직업으로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고요.”

고민 끝에 중2 때 영재교육을 그만두고 10대 청소년이 보통 그렇듯 게임에 빠졌다. ‘스타크래프트’로 입문해 ‘포탈2’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다. 그런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영재교육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눈빛이 바뀌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어른들은 게임이라고 하면 거의 마약 같은 사회악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물리학자가 되겠다던 아들이 게임 개발을 하겠다니까 ‘다른 직업을 가지면 안 될까?’ 하시더라고요.”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됐다. 게임 관련 특성화고에 가고 싶었지만 역시 부모님 반대로 일반고에 진학했다. 게임 쪽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지만 숨겼다. 학교 선생님마저 ‘왜 하필…’ 이런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2 때인 2014년 세계적으로 VR 바람이 불어닥친다. 이거다, 싶었다.

“VR도 사실 게임 플랫폼이거든요. 그런데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고 VR 한다고 하면 부모님도, 학교에서도 응원해주는 분위기였어요.”

차선책이었지만 제대로 파고들었다. 당시만 해도 VR 전문가 풀이 좁아 영어 원서와 논문을 찾아 읽었다. 한국학생가상현실학회를 만들어 행사도 열고, 정보 공모전에 나가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 S전자 등 국내 대기업 연구원들도 참가한 수준 높은 대회였다.

◆결국은 기본

자연히 학교 공부와는 멀어졌다. 흔히 말하는 ‘인서울 대학’(서울시내 대학)은 어림없는 성적이었지만, 고교 시절 VR 활동 덕에 서울의 한 사립대에 붙었다. 하지만 1년 만에 휴학했다.

“처음엔 ‘인서울’에 감지덕지하는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대학 공부도 고등학교 때처럼 외우고 시험 보는 게 전부더라고요. 그냥 자퇴하고 싶었지만 어머니 만류로 일단 휴학하고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죠.”

휴학 후 1년간 그는 ‘업계의 현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VR 스타트업에 들어갔고, 중견 게임기업에서 준인턴을 하며 환상은 완전히 무너졌다. 상상의 나래를 온라인으로 구현하는 게 게임 개발자라 믿었지만, 실상은 기계적으로 코딩하는 단순 기술자가 대부분이었다.

“스타트업에서 나와 게임기획 학원을 다녔는데 거기서도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너희들은 회사의 부품이지, 창작하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2015년 인재상을 탄 뒤로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는데 이제 봤더니 저는 먼지 같은 존재더라고요.”

1%의 실력자만이 꿈을 펼칠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그는 회사생활과 삼수 준비를 병행해 서강대에 입학했다. 입학한 지 9개월째인 지금까지 늘 아침 7시에 학교에 나온다. 1시간은 영어 공부를 하고 첫 수업 전까지는 과제나 수업 준비를 한다. 왜 배워야 하는지 이유를 알았기 때문에 요즘에는 공부가 너무 즐겁다.

◆“꿈? 속도보단 방향이죠”

“이거 꼰대처럼 들릴 수 있는데…”라며 그는 중·고등학교 때 어른들이 공부하라고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저도 코딩하다가 정석 책을 다시 펼쳐보고 그래요. 총알이 날아가 캐릭터를 쓰러뜨릴 때 총알 움직임 정보를 벡터로 알려주는 데 조금 어렵거든요. 국어도 마찬가지예요. 프로그래밍 언어랑 인간 언어가 결국 논리 전개 측면에선 똑같아요.”

게임과 VR의 눈에 보이는 기술만 좇다 업계 현실을 보고 나니 결국 무슨 일을 하든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에서 먼저 학생들에게 왜 배워야하는 지 이해시킨 다음 가르치면 좋을 텐데 왜 그냥 ‘공부하라’고만 할까요.”

이씨는 앞으로 좋은 영향을 주는 미디어 생태계를 만들고 싶다.

“우리나라 게임시장 규모가 12조원이라고 하는데 정말 건강한 생태계인지 모르겠어요. 어린 학생들을 타깃으로 끝없이 게임머니를 쓰게 하고, 모바일에 집중돼있거든요. 제가 게임에서 좋은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건강한 미디어 환경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내년에 군 입대를 할 예정이다. 이제 막 학구열이 타오르기 시작했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상관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히려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응용에 몰두하다보면 실력에 한계를 느끼는 시점이 와요. 그럼 다시 기본으로 돌아와야 하죠. 응용과 기본 사이를 사인그래프처럼 왔다 갔다 하다보면 실력이 점점 불어날 거라고 믿어요.”

마지막으로 꿈을 찾지 못해 걱정하는 청소년들에게 ‘조금 늦어도 괜찮다’는 말을 전했다.

“사실 우리 교육제도가 꿈을 찾을 여유를 제공해주지 않잖아요. 같이 영재교육원 다닌 친구들 중에 과학고 조기졸업하고 명문대까지 엘리트 코스를 성공적으로 밟고도 방황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고 보면 인생에서 중요한 건 속도보다는 방향 같아요. 조금 늦더라도 꾸준히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길을 찾았으면 해요.”

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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