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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이젠 포기 상태다. 아무래도 학력이 문제 인 것 같아서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해서 졸업장을 땄지만 아직도 해답이 보이지 않고 있다. 계속 나이는 늘어가는데 날 받아 줄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얼마 전 부터는 모든 걸 '스톱'하고 방바닥만 뒹굴면서 나에게 물어보고 답하는 일로 하루 하루를 소진했다. 왜 난 빵빵한 재력이 있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으면, 키라도 커서 외모가 받쳐주던지? 참고로 난 대한민국 표준 키에서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모자란 키의 소유자이다.

이런 나에게 누군가 '콜'을 했다. 그것도 앞 뒤 말 다 잘라먹고  한마디다. "너 정신병원 갈래? 극장 갈래?" 이 말에 난 "에엥?" 선배는 다시 한마디 한다. "아무래도 극장이 더 나을 듯 하다. 오늘 6시까지 명동으로 후딱 뛰어와!" 그리고는 전화가 뚝 끊어졌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후다닥 옷을 챙겨입고 명동으로 나가 보게 된 연극이 [내 심장을 쏴라]이다.

선배는 연극을 보기 전 갑자기 농담을 던졌다. "너 심장 바닥에 떨어진 것 같다"라고 말이다. "연극 보고 나선 바닥에 떨어진 심장 확실히 제자리에 넣어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럴수록 난 '오늘 선배가 미치기로 작정했나 보군' 하는 의심만 잔뜩 품게 되었다.

연극 [내 심장을 쏴라](연출 김광보)는 제 5회 세계문학상 수상자인 정유정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연극의 무대는 강원도의 외딴 정신병원이다. 정신분열, 공황장애로 6년에 걸쳐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 해 온 수명(김영민 분)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여기에 가족 간 유산 싸움에 휘말려 강제로 입원 당한 재벌가의 사생아 승민(이승주 분)이 등장해 수명 뿐 아니라 연극을 보러 온 모든 이들이 그간 아무데나 버려놓은 자신의 심장을 '후딱' 집어들게 만든다.

나무늘보 행동을 연상시키는 걸음걸이, 무료한 표정을 지닌 수명은 '세상에서 도망치는 병'을 앓고 있다. 수명의 인생 내력에 대한 궁금증보다 수명에게서 내 모습을 먼저 본 것이 충격이었다. 수명은 자신을 병원에 밀어넣은 아버지를 원망하고, 돌아가신 엄마에 대해 죄스러움을 가질 뿐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나 역시 몇 군데 지원서를 들이밀고 매번 끔찍한 열패감을 맛보지만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저 비슷 비슷한 회사에 이력서를 낼 뿐이다.

수명이 더 나을 것도 없이 그저 주어진 운명안에서 대강 적응 해 나가려는 인물인데 반해 승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인물이다. 연극 속에선 세상이란 병원에 사는 수명을 미쳐서 갇힌자, 승민을 갇혀서 미쳐가는 자로 설정해 놓았다.

공연 초반엔 조금 희희낙락 거리면서 관람을 했던 것도 사실. 그런데 승민이 뒤돌아서서 트위스트 춤을 추기 위한 도입부분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다. 분명 승민은 뒤돌아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얼굴 표정은 볼 수 없다.  뒷모습만 객석에 노출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 뒷모습에서 어떤 노래가 나올지 바로 직감하기 시작했고 뭔가가 가슴 속에서 '울컥 울컥'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몇 초 후 바로 환자들이 어우러져 트위스트를 추기 시작했다.

이건 단순한 춤이 아니었다. 승민이란 인물이 수명에게 '넌 누구냐?'와 같은 심장 뛰는 질문 을 던지면서 '생각'이란 것을 해 보게 만든 것 처럼, 이 트위스트 장면에선 거리의 악사, 509호 거시기, 버킹엄 공주등 모든 환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특히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거리의 악사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번지면서 하모니카가 불어지고, 시도때도 없이 바지를 내리는 509호 거시기와 똑같은 바지내리기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질감을 내보이는 장면, 버킹엄 공주의 왕관을 머리에 써보며 그녀에게 마음을 내보이는 장면 등으로 승민은 모든 인물과 소통하고 있었다. 이 장면에 대해 선배는 원작 소설보다 더 강렬한 이미지였다고 평했다.

승민이 삶을 바라보는 에너지 넘치는 시각은 예상외의 울림을 주었다. 승민이 '니 시간을 살아'라고 한 것 처럼 나도 내 인생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방바닥을 뒹굴거리는  시간은 이제 'NO'. 그동안 난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른 체 그저 번듯한 회사에 지원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화사 역시 이런 내 모습을 먼저 알아보고 채용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것도 모른 체 일이 잘 안풀리는 나의 운명을 탓하며 거의 '조울증'으로 까지 가기 직전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난 후, 선배가 전화에서 했던 "정신병원 갈래? 극장 갈래?란 말이 결코 농담만은 아니었다는 게 새삼 실감났다. 난 100분동안 사이코 드라마를 경험한 것 처럼 뭔가가 치유되는게 분명 느껴졌다. 이젠 떨어진 심장을 제자리에 붙일 일만 남아있다. 그것도 '싱싱하게 살아있는 심장'으로 붙여야 겠다.

정다훈(otrcoolp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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