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는 4일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를 “보복적 성격”으로 규정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고 국제사회에 부당함을 설명하는 등 외교적 대응을 적극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이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 회의를 가진 뒤 “상임위원들은 최근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에 취한 보복적 성격의 수출 규제 조치는 WTO의 규범 등 국제법을 명백히 위반한 것으로, 일본이 이런 조치를 철회하도록 하기 위한 외교적 대응방안을 적극 강구해 나가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공식 대응을 자제해온 청와대가 정면 대응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함에 따라 한·일 간 무역갈등이 한층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도 이날 일본에 맞선 ‘상응조치’ 단행을 예고해 미·중뿐 아니라 한·일 간에도 무역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한 라디오프로그램에 출연해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해 “강제징용에 관한 사법부의 판단을 경제 영역에서 보복하는 조치라고 명백히 판단한다”며 이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은 이날 0시부터 한국의 주력 수출 제품인 반도체·스마트폰·디스플레이에 사용하는 자국산 소재·부품에 대한 수출 규제에 나섰다. 또 외국환 및 외국무역관리법에 따른 우대 대상인 ‘화이트(백색) 국가’ 리스트에서 조만간 한국을 뺄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기업에 소재 공급을 의존해 온 삼성과 LG 등 국내 기업의 반도체 생산이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기업의 반도체를 공급받아 쓰는 세계 관련 업계도 연쇄 충격을 받을 전망이다.
홍 부총리는 “한국 경제뿐 아니라 일본 경제에도 피해가 간다. 아주 바람직하지 않은 조치”라며 “서로 죽자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WTO 제소가 유일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며 “국제법이라든가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조치들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일본에 수출 규제를 할 가능성도 열어뒀다. 일본 쪽에다가 타격을 줄 수 있는 수출 규제, 경제 조치도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홍 부총리는 “배제할 수 없다”고 답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한국에 단기적으로 가장 피해를 줄 수 있는 품목을 골랐겠으나 일본 기업에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면서 “중요산업 밸류체인상으로 보면 한·일 기업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기업의 생산에 중요한 차질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일본 아베 총리가) 정치적 이유로 경제 제재 한다는 것을 표명한 것 아닌가”라며 “WTO 체제에 위배되는 말씀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한국 정부는 그런 부분에 원칙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日 조치는 자유무역주의 위배”… 글로벌 여론전으로 선회
일본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 통제를 강화한 4일 한국 정부도 ‘상응한 조치’를 마련하겠다며 맞대응에 나섰다. 청와대와 정부는 일본 조치를 ‘보복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세계무역기구(WTO) 제소와 대일 수출 규제 등 외교·무역분쟁을 불사한 전면전을 택했다.
◆침묵하던 靑, 여론 의식해 적극 대응으로 전환
그동안 청와대는 일본의 수출 통제가 우리 산업계에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에도 대응을 삼가며 신중한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런 전략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직접 나서 “WTO 위반이 아니다”며 한국에 대한 공세를 주도하는 것과 대비돼 부정적 여론을 자극했다. 그런 만큼 산업계의 불안감 고조와 싸늘한 여론에 부담을 느낀 청와대가 이날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를 소집해 단호한 대응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우선 주변국에 일본의 보복적 성격을 널리 알리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윤도한 국민소통수석은 기자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일본 조치의 부당함과 자유무역주의에 위배된다는 사실 등을 주요국에 설명할 예정”이라며 “국제적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외교 무대에서 일본과 정면 승부를 벌이겠다는 것이다. 한 고위관계자는 NSC의 ‘보복적 성격’ 규정에 대해 “아베 총리가 언론 인터뷰에서 그렇게 밝혔기 때문에 (상임위원들도) 그렇게 판단한 것”이라고 전했다.

◆정부 관계기관 대책회의
이날 열린 ‘일본 수출 통제 관련 관계기관 회의’에서는 일본 조치와 관련한 향후 대응 방안이 논의됐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모두발언에서 “일본의 조치는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하지 않을 것이며, 선량한 의도의 민간거래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전략물자 제도를 운영해야 한다’고 명시한 ‘바세나르체제(다자간 전략물자 수출통제 체제) 기본 지침’을 위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일본이 ‘신뢰 훼손’이라는 자의적 주장을 하면서 수출제한 강화조치를 발동하는 것은 전략물자 수출통제 취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며 “한국은 전략물자 4대 수출통제 체제 및 3대 조약에 모두 가입한 모범국가로서 다른 바세나르 체제 회원국으로부터 전략물자 관리에 대한 어떤 지적도 받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유 본부장은 원칙적으로 상품 수출에 대해 금지나 제한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그 예로 수출허가제도를 명시하고 있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11조를 인용하면서 일본의 조치가 WTO 규범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일본의 조치가 WTO 규범에 부합한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또 정부는 구윤철 기재부 2차관 주재로 ‘일본 수출규제 관련 부품·소재·장비 관계 차관회의’를 연 뒤 일본 수출 규제 대상 3개 품목과 추가 제재 가능한 품목에 대해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자립화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직후부터 일본의 보복 가능성에 대비해 경제·사회분야 테스크포스(TF)를 구성해 대응책을 마련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 대한 상응 조치 주목
우리 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 추이를 지켜보면서 WTO 제소 절차를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소비재 수입규제를 강화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대일 자동차 무역적자는 1조2000억원에 달한다. 지난해 1∼11월 국내에서 판매된 일본차는 5만3000대에 달하지만, 일본에서 판매된 한국차는 불과 300대뿐이다. 일본 패션브랜드 유니클로 등에 대한 수입규제 강화도 대응 조치가 될 수 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나서서 수출를 규제한다면 무역분쟁으로 격화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득보다 실이 크다”며 “현재 우리나라의 대일본 무역수지 적자가 심각한 상태여서 소비재 수입을 줄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벌써부터 일본산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얘기가 나오고 있는 만큼 장기적으로 보면 일본도 피해가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직접적 타격을 받게 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주요 고객사들을 대상으로 ‘안내 서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 등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 2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의 주요 고객사에 “차질 없이 제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만약 문제가 발생한다면 즉시 알려드리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했다. 삼성전자는 미국 퀄컴, 엔비디아, IBM 등 유력 IT 업체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생산·공급하고 있다. SK하이닉스도 일부 고객사의 문의가 이어지자 이번주 초에 비슷한 내용의 서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D램 시장에서 점유율 70% 이상, 낸드 시장에서 5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경우 글로벌 전자업계에 연쇄적인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 “일본 제품 쓰지 말자” 불매운동 확산
일본 정부가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규제’를 단행한 데 대한 우리 소비자들의 불매운동이 온·오프라인상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외교전문가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나친 감정적 대응은 삼가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4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일본 여행을 자제하고 일본산 제품을 사지 말라는 게시물이 확산하고 있다. 국내에서 활동 중인 일본 국적의 연예인을 퇴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누리꾼들 사이에선 ‘일본 제품 불매 리스트’도 빠르게 퍼지고 있다.
시민들은 일장기를 패러디한 포스터 등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하고 채팅 프로필로 해두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해시태그 ‘#일본제품불매’도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이날 온라인과 SNS에서는 “아베가 무릎을 꿇고 빌 때까지 불매운동을 해야 한다” “여행만이라도 자제해 애국하자” “작은 것부터 힘을 모아 한국의 의지를 보여주자”는 게시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오프라인에서도 이 같은 움직임이 감지된다. 대학생 단체 ‘겨레하나’는 전날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과 광화문사거리, 광화문 유니클로 매장, 도요타 대리점, 용산역 강제징용 노동자상 앞에서 1인시위를 벌였다.
시민·농민단체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징용피해 할머니들을 돕고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시민모임)은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응해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을 검토하고 있다. 시민모임은 이날 현재까지 전국 5만여명으로부터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동의하는 서명을 받았고, 불매운동 확산을 위한 연대활동을 모색 중이다. 경기도농민단체협의회도 이날 경기도의회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제품 불매와 여행 거부 운동까지 제2의 항일운동을 벌이는 데 앞장 서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제경제 전문가들은 이러한 움직임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한·일 관계 회복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국가 간의 관계가 나쁘다고 해서 민간에서까지 서로 극단적인 대응을 하며 관계를 악화해선 안된다”며 “장기적인 관점의 ‘출구전략’을 감안해서라도 냉정을 되찾고 합리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세종=안용성 기자, 김달중·우상규·이현미·김라윤 기자, 광주=한현묵 기자 ysah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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