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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홀로코스트 현장서 인간다움을 찾다

입력 : 2016-02-17 21:09:46 수정 : 2016-02-17 21: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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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슬로 네메스 감독 ‘사울의 아들’

칸국제영화제가 선호하는 영화는 무엇일까. 세계 영화시장의 60% 이상을 잠식하고도, 할리우드는 왜 온순하게 칸영화제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걸까. 답은 라슬로 네메스 감독의 새 영화 ‘사울의 아들’이 알려준다. 관객들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흔히 만날 수 없는, ‘걸작’을 골라내는 칸의 ‘안목’에 실로 무릎을 탁 내려치게 된다.

<<사진 = 홀로코스트를 색다른 기법으로 묘사한 ‘사울의 아들’은 죽은자에 대한 경의를 통해 ‘인간다움의 가치’를 이야기 한다.>>
나치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시체들을 처리하기 위한 비밀 작업반이 있었다. ‘존더코만도’라 불리던 이들은 X자 표시가 된 작업복을 입고, 오직 시키는 대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다. 이들 역시 끌려온 유대인들로 6개월쯤 사역하다 처형된다. 어느 날, ‘존더코만도’ 소속의 사울 앞에 어린 아들의 주검이 도착한다. 처리해야 할 시체 더미들 사이에서 아들을 몰래 빼낸 사울은 랍비를 찾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기로 결심한다.

영화 속 사울은 인간이기를 포기당하는 잔혹한 현실에서 생존하고 있다. 그도 곧 가스실에서 죽어갈 것이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지옥에서, 사울은 마치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죽기 전에 가장 인간다운 행동을, 가장 신성한 행위를 하라.’

인류와 종교의 근원을 이루는 의미 있는 행위는 바로 죽은 자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영화는 시체 공장 같은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죽음의 의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면서 인간다움의 가치에 대해 주목한다.

놀랍게도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앞모습이나 뒷모습만을 잡는다. 항상 사울을 따라다니며 그의 시청각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관객들은 사울이 보고 듣는 것을 함께 보고 듣고, 그가 가는 곳을 뒤따르며 그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사울은 잔혹한 현실을 버텨내기 위해 희생자들의 주검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다. 관객들도 화면의 중앙을 차지한 사울의 모습 뒤로 슬쩍슬쩍 부분만 보이거나 가장자리로 뿌옇게 비치는 장면들을 통해서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이는 지켜보는 이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며 엄청난 흡인력을 발휘한다. 객석의 관객들은 이렇다 할 저항 한번 없이 쉽게 화면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제한적인 공간의 느낌을 주는 4대 3 화면비와 디지털 촬영 대신 35㎜ 필름을 선택한 것도 영화의 감성을 강화하려는 의도다.

영화는 또 배제된 이미지를 보충하고 더욱 강렬한 현장감을 전하기 위해 인공적인 기법을 첨가하지 않은 생생한 소리를 그대로 살렸다. 독일군이 ‘존더코만도’들에게 작업을 지시하는 소리, 가스실 바닥과 벽을 솔로 닦는 소리 그리고 독일어와 유럽 각지에서 온 유대인들의 다양한 언어 등 8개 국어가 뒤섞여 들린다. 이러한 사운드는 촬영으로 보여줄 수 없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보완한다. 가스실 안에서 행해지는 학살의 경우, 굳이 카메라가 비추지 않더라도 죽어가는 유대인들의 비명 소리와 잠긴 문을 조급하게 두드리는 소리 등 강렬한 사운드로만 전달하는 것이다. 직접 보여주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들려주는 방식을 통해, 그 현장에 있는 듯한 극강의 사실감을 끌어다 안긴다. 관객의 충격을 최대한 증폭시키는 이 같은 사운드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서 어느새 새로운 체험이 되어 영화적 의미를 확장시킨다.

사울은 유대인의 장례법에 따라 아들의 주검을 24시간 안에 묻어주려고 동분서주하지만, 영화는 막바지에 이르러 슬며시 의문 하나를 흘려놓는다. 소년의 주검은 진짜 사울의 아들인가, 아니면 사울의 환상인가. 그리고 혼란을 틈타 독일군을 피해 달아나던 사울이 오두막 안에서 바라본 바깥의 소년 모습은 희망에 대한 상징일까, 아니면 생존을 위해 혼을 쏙 빼놓고 살아가는 군상들이 그나마 간직하고 가야 할 마지막 자존감 같은 게 아닐까. 풀이는 관객의 몫이다.

미스터리를 남겼지만 이로써 영화의 메시지는 좀 더 명징하게 드러난다. 아들의 장례를 치르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은 ‘이미 예전에 죽었던 것’처럼 살고 있던 남자가 생애 마지막으로 인간다운 행위를 하는 이야기로 확장된다. 영화는 시종일관 무표정 상태로 어떠한 감정도 내보이지 않던 사울이 마침내 카메라를 응시하며 미소를 짓는 장면에서 종극을 맞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생한 민낯을 다룬 이 영화가 끔찍하고 섬뜩한 지옥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마지막 미소 덕분이다. 사울과 여정을 함께 한 관객들에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간다움’을 일깨운 것 같아 안도감을 안긴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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