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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충 … 출근충 … 벌레먹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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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8-26 20:33:25 수정 : 2015-08-27 15:5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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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필자의 기사를 인용한 게시물을 발견했다. 기사의 내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조롱과 비하의 댓글이 가득했다. 기사 작성자로서 ‘이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익명으로 “기사에 적힌 내용은 그런 뜻이 아니지 않느냐”는 댓글을 달았다. 그랬더니 그 밑에 ‘진지충 극혐’이라는 댓글이 달렸다. ‘진지충(蟲)’이란 ‘유머 코드 등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혼자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벌레에 빗대 비하하는 조어다. ‘극혐’은 말 그대로 ‘극도로 혐오한다’는 말을 줄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별것 아닌 것을 두고 길게 설명을 늘어놓는 사람은 ‘설명충’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면 요즘 마음에 들지 않는 집단을 벌레로 부르는 표현이 부쩍 늘었다. 말끝마다 ‘충’을 붙이게 된 기원을 놓고는 일본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래했다는 설, ‘무뇌충’이 시작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정확한 기원은 확실치 않다. 어느 쪽이든 우리 사회에선 ‘충’이 벌레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벌레’는 점점 그 쓰임새가 넓어지더니 이제는 거의 전 국민을 한두 개 이상의 ‘충’으로 부를 수 있게 됐다. 학교에 다니며 급식을 먹는 ‘급식충’, 대학 입시와 관련된 ‘수시충’(수시전형으로 입학한 학생), ‘지균충’(지역균형 선발로 입학한 학생)이란 조어가 난무하더니 이제는 취업을 위해 토익 공부에 매달리는 ‘토익충’, 취업에 성공해서 직장을 다니는 ‘출근충’이 생겨났다.

이뿐인가. 심지어는 탕수육을 먹을 때 소스를 부어 먹는지 소스에 찍어먹는지에 따라 ‘부먹충’, ‘찍먹충’으로 나누기도 한다. ‘떼빙’(떼+드라이빙)을 하는 ‘자전거충’, 아이의 민폐를 묵인하거나 옹호하는 ‘맘충’도 요즘 인터넷에 매일같이 보이는 단어다. 물론 ‘충’을 붙인 조어 중에는 농담처럼 가벼운 것도 있고 개념 없는 행동을 비판하기 위한 것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비하의 뜻을 담고 있다. 처음 만들어져서 유통될 때는 혐오감을 야기해도 다수의 사람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계속 사용하다 보면 일상 속에 시나브로 녹아들지 모를 일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사전에는 ‘벌레’를 ‘곤충을 비롯하여 기생충과 같은 하등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어떤 일에 열중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두 번째 뜻으로는 ‘공부벌레’, ‘일벌레’ 등이 주로 쓰인다. ‘공부벌레’나 ‘일벌레’도 긍정적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때 쓰인 ‘벌레’에서는 뭔가 생존을 위해 나뭇잎을 열심히 갉아먹고 있는 분투 정도는 느껴진다. 장차 나비로 화려하게 변신할 수 있다는 미래지향적인 벌레의 이미지다. 하지만 ‘토익충’이나 ‘출근충’에서는 뭔가 음습하고 퇴영적인 냄새가 난다.

우리 사회에서 한때 ‘깜둥이’, ‘튀기’라는 비하적 표현이 사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난해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언론매체들은 ‘장애자’, ‘벙어리’ 등 장애인 비하 표현을 삼가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 기존에 존재하던 차별적, 비하적 표현도 줄여나가야 할 시점에 ‘충’을 접미사로 한 새로운 비하 표현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는 현실은 우려스럽다.

이우중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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