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동서양 문명의 융합 통한 '통합적 세계관' 제시
'21세기 르네상스 한반도서 주도' 메시지 던져
서양의 근세는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된다. 르네상스는 고대문명의 부활을 뜻한다. 르네상스는 지리상의 발견시대가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리상의 발견은 아메리카를 발견(1492년)한 콜럼버스로부터 시작했으며, 선두 주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15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사이 그 중심은 영국·프랑스·독일, 그리고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1776년)한 미국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독립한 뒤 남북전쟁을 거쳐 세계사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근대의 기점은 확실히 영국의 산업혁명이다. 영국은 산업혁명과 함께 명예혁명을 일으키며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고, 산업과 정치에서 근대를 이끌어간다. 프랑스는 자유·평등·박애사상을 기치로 내건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근대정신을 심화시킨다. 독일도 뒤질세라 철학과 음악 등을 보태며 깊숙이 관계하게 된다. 서양이 인류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은 바로 근대에 이르러서다.

우리는 흔히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부른다. 서양의 중세는 기독교가 국교인 시기인데 왜 암흑의 시대였는가? 기독교가 속세와 결탁하여 면죄부를 파는 등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중세는 이슬람 사라센문명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시기였다. 이슬람 문명권은 중세에 가장 괄목할 만한 영광을 누렸다.

오늘날 과학의 용어들은 대개 이슬람 문명권의 소산이다. 예컨대 대수학(algebra)·화학(chemistry)·연금술(alchemy)·천문학(astronomy)·점성술(astrology)·음악(music) 등은 아랍어에서 유래되었다. 이슬람의 수학은 인도에서 발달한 ‘0(zero)’을 처음으로 수입하고, 그것을 유럽에 전파하였다. 천문학·광학·연금술은 이슬람 문명의 업적이었다. 이슬람의 지도(地圖) 제작과 의술의 발달은 유럽 르네상스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오늘날 용어만을 남기고 문명의 주도권을 서양에 넘겨준 셈이다.

근대의 결과, 유럽은 기독교와 산업사회를 전 지구에 퍼뜨리고 이것은 제국주의의 성격을 띠면서 시장경쟁에 나선다. 이것의 결과가 1차, 2차에 걸친 세계대전이다. 근대는 서구의 자연과학과 기독교가 시대를 이끌어가는 두 개의 기둥이 되면서 서양을 세계사의 중심에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게 한다.

서양의 근대는 자연과학 중심이다. 그러나 자연과학 시대라고 해서 종교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연과학 시대일수록 종교적 윤리도덕도 과학적 합리성과 발맞추어야 하고 합리화의 방법도 달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서구 근대문명에 가장 성공적으로, 그리고 재빨리 적응한 나라가 일본이다. 그래서 일본은 동양의 서양으로 행세하고 대접을 받아왔다. 일본은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산업화에 성공하는 한편 종교적으로는 재래의 일본적 샤머니즘인 신도(神道)를 발전시켰다. 일본인들은 ‘모든 종교는 신도이다’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서구로부터 과학은 도입하면서도 종교는 신도를 유지하였다.

일본은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세 초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한국에서 문화를 수입하던 입장을 탈피하여 문명의 흐름이 선진 서구에서 동양으로 선회함에 따라 재빨리 그것에 편승하여 한국·중국·일본 3국 가운데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루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그들 나름의 주체적 근대화였다. 말하자면 동양문명의 패러다임에 의존하던 나라가 서양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는 불행하게도 대동아공영권으로 강요되었고,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일본은 서구의 제국주의보다 훨씬 비인간적이고 비인륜적이었다. 일본은 선진국으로서의 덕(德)이 부족하였다. 물론 일본의 이러한 군국주의적 야망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패함으로써 막을 내렸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남태평양의 여러 나라들은 곤욕을 치렀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주자학적 패러다임으로 나라와 사회를 경영해온 한국은 조선 중기인 15∼16세기부터 인류 역사의 시대적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고 붕당정치로 인해 국방을 소홀히 하면서 국가에너지를 낭비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인 1592년은 공교롭게도 조선이 건국한 1392년에서 200년이 지난 시점이다.

한 나라가 성립된 지 200년쯤 지나면 아무래도 기강이 해이해져서 재강화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런데도 재강화하지 못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난을 맞았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영조·정조 시절에 북학파나 실학파에 의해 추진된 근대적 개혁이 완전히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구한말과 일제를 맞게 된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는 지금부터 200여년 전이다.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프랑스 신부 그라몽(Grammont)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왔을 때부터 본격적인 신자들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이승훈은 귀국하자마자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지금의 명동성당 부근 명례방에서 정기적인 신앙 집회를 가졌다.

한국 천주교는 자발적으로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1845년 8월17일)을 받고 돌아오기(1845년 10월) 전에 평신도들이 중국에서 천주교 성경과 교리를 도입해서 시작한 세계에서도 유일한 경우이다.

천주교는 여러 박해를 겪었다. 최초의 박해인 ‘을사추조적발’(1785년)과 조상제사를 거부했던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전주에서 순교한 ‘신해박해’(1791년),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에서 발단된 ‘을묘박해’(1795년), 그리고 가장 대규모의 박해로 순조(純祖) 즉위와 더불어 시작된 ‘신유박해’(1801년)와 헌종(憲宗) 때 ‘기해박해’(1839년)가 그것이다. 1846년의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체포되고 순교하게 된다. 천주교는 전통 주자학 체계와 여러 갈등을 겪으면서 발전해 왔다.

이 땅의 기독교는 처음부터 박해의 연속이었다. 프로테스탄트는 정동교회, 새문안교회와 함께 시작한다. 정동제일교회는 1885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로,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 10월11일에 정동에 있는 자신의 사택에서 한국인 감리교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한 것을 시초로 삼는다.

새문안교회가 조직된 것은 1887년 9월27일 정동에 있는 한 한옥에 14명의 한국인과 언더우드 목사, 로스 목사가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주일예배는 언더우드 목사 사저의 사랑채에서 정기적으로 있었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의 ‘소래교회’(1884년, 1885년)이다.

부산 동구 범일동 토담집. 문선명 총재는 6·25 피란지인 이곳에 머물며 ‘원리원본’을 집필했다.
천주교는 200년, 기독교는 100년 남짓이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성경(聖經)을 기본 경전으로 하기 때문에 같은 종교이다. 기독교의 다른 종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성경이 이 땅에 도입된 지 200여년 동안 성경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었고, 그 해석에 따라 여러 종파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 기독교계에 우리나라가 독자적인 성경해석이라고 할 만한 것을 내놓은 것은 없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서양에서 해석한 대로 그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의 해석을 둘러싸고 독자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보면 세계적 보편성에 특수성을 가지고 참여하는 경우이다. 외래문화나 사상을 도입한 나라가 자신의 문화적 특수성을 배제한 채 외래사상이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토착화라고 할 수 없다. 거꾸로 토착화 이전에는 외래의 것을 완전히 소화했다고 할 수 없다.

1965년 8월31일 요르단 암만공항에 도착한 문선명 총재 일행이 현지 주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문화는 필연적으로 주체적 해석이나 적어도 절충적·통합적 해석을 하기 마련이다. 두 문화가 만나서 제3의 새로운 통합을 이루지 못하면 발전이라고 할 수 없다. 근대화 이전에 동아시아는 유교문화권이었다. 근대화 이후 서양의 기독교가 들어왔다면 둘은 당연히 소위 습합(褶合)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한·중·일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성공을 ‘유교자본주의’라고 서구에서 해석한다. 이러한 과정이 종교 분야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동안 한국의 기독교는 소위 보편주의·정통주의·근본주의에 의해 정통과 이단을 분리하면서 논쟁과 몸싸움을 벌여왔다. 이것은 동시에 정치적 기득권 싸움이기도 했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세력과 새로운 세력이 확장하는 세력 간에 모함과 이간과 왜곡이 벌어졌다. 어느 종교가 많은 기독교 신앙인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지는 미래만이 안다.

고대 삼국시대에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차돈의 죽음’이 있은 뒤에 당시 외래 종교였던 불교가 신라에서 합법화(국교화)되었다. 당시 원효(元曉)는 ‘화쟁론’(和諍論)을 제기하면서 불교에 대한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말하자면 통합적 해석을 선보였다. 오늘의 통일교가 기독교 보수종단과 갈등을 보이는 것은 아직 그러한 통합과정 중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67년 7월1일 일본을 방문한 문선명 총재가 도쿄 시로야마 산정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통일교는 기독교를 ‘혈통적 기독교’ ‘심정적 기독교’로 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혈통적’이라고 함은 ‘순수한 아담의 혈통’이다. 그래서 ‘축복결혼’이 중요한 의식이다. 여기서 ‘심정적’이라고 함은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어(통일된 상태에서) 통하는 하나님, 우주만물이 하나가 되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민족종교이면서 세계종교로 탈바꿈한 통일교가 세계문화, 특히 서구의 기독교 문화와 정면으로 만나게 된 것은 통일교의 미국 진출 이후이다. 일본 선교를 통해 재정적인 거점을 마련한 통일교는 기독교 문명의 본거지인 미국에서 승패를 가르는 정면승부의 선교전쟁을 감행한다.

미국 선교의 승패의 갈림길은 매디슨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대집회였다. 이날 문선명 총재의 영감에 찬 설교와 제자 박보희 보좌관의 유창한 영어실력과 전심전력으로 한 통역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1974년 9월18일 제4차 세계 순회강연 중 미국 8대 도시 순회강연회의 한 부분으로 열린 ‘희망의 날’ 뉴욕 대강연회, 매디슨스퀘어 강연장은 2만5000여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지정좌석 2만석을 초과하여 5000석의 임시좌석을 마련할 정도로 성황이었다. 그야말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이었다. 미국 입성 후 첫 포효(咆哮)였다. 이 자리에서 문 총재는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매디슨스퀘어 가든은 말하자면 우리 시대의 로마광장과 같은 곳으로 지구촌 오색인종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거기에서 지구촌 인종들은 똑같이 ‘하늘(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날 강연회의 성공 이후 미국 선교는 일취월장이었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문화의 본거지인 미국에서의 선교가 순탄할 리가 없었다. 한국에서의 ‘이화여대·연세대 사건’(1955년 문선명 총재를 따른다는 이유로 수십명의 교수와 학생이 제명당한 사건)에 버금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댄버리 교도소’ 사건이다. 1984년 5월30일 미연방대법원이 투옥 결정을 했고, 세계는 항의시위집회(워싱턴 로즈회관)에 들어갔다. 6월11일 ‘종교의 자유를 위한 집회’(뉴욕 쉐라톤 호텔, 1000여명)에서 무죄가 주장됐다. 미국 60개 종파 300여명의 성직자들도 투옥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집회에 참가했다.

일본은 6월12일 도쿄시위집회(5000여명), 한국은 6월14일 ‘종교의 자유를 위한 대회’(서울 힐튼호텔, 1350명) 등을 통해 미국의 각성을 촉구했다. 댄버리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은유되었다.

1981년 10월22일 미국 뉴욕 맨해튼 지방법원에 출석한 문선명 총재가 탈세 혐의에 관해 증언하고 있다.
이때 문 총재는 미 상원 법사위 헌법소위 청문회에서 증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으시려 합니다. 자유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공산독재입니다. 공산당은 이미 1억5000만의 무고한 인명을 죽였습니다. (중략)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속속 공산화되었습니다. 적어도 15억의 인류가 공산치하에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미국의 뒷마당이라 할 수 있는 중미 일대가 최일선이 되었습니다. (중략) 여러분께서 본인의 이와 같은 방대한 공익사업의 범위를 아신다면, 본인이 미국에 와서 2만5000달러의 탈세를 꾀하였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아니할 것입니다. 본인의 재판사건은 처음부터 탈세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미국 정부의 주도적인 종교재판이었습니다. 본인의 유죄판결은 종교 자체를 실천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뜻입니다. 종교지도자라는 바로 그 본질 때문에 본인은 처벌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가 막힌 사실은 미국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쳤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신앙인들이 드디어 일어섰습니다. (중략) 본인은 오히려 미국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지금 이 순간 본인의 심정은 하나님께 감사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중차대한 시기에 본인을 택하시어 이 나라 종교 자유를 쟁취하는 싸움에 선봉장이 되게 하시며 미국의 대각성을 촉구하는 대도화선이 되게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중략) 하나님이시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감사합니다.”

문 총재는 댄버리 교도소 입감 전에도 성명을 발표했다.

“이제 본인은 교회의 세계본부를 이 나라를 위하여 계속 기도할 댄버리 교도소로 옮길 것입니다. 본인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에 본인을 종교자유 수호를 위한 지도자로서 미국의 영적 각성운동에 점화의 도구로 쓰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1984년 7월20일 오후 11시(한국시간 21일 정오), 문 총재는 18개월간의 복역에 들어갔다. 원고는 미합중국, 피고는 문선명이었다. 결국 미국 정부는 조그마한 탈세(?)를 빌미로 기성교단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그 탈세의 내용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3년간 통일교회 식구들이 헌금한 160만달러를 뉴욕 체이스맨해튼 은행에 예탁했었는데 여기서 발생한 이자 11만2000달러에 대한 소득세 1000달러(당시 약 70만원)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댄버리 사건을 통해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은 그때 벌써 미국 내에서도 항의시위가 많았다는 점이다. 댄버리 사건은 크게 보면 통일교의 미국 선교과정에서 발생한, 기득권과 새로운 세력 간의 갈등이며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의 마찰이며 만남이기도 했다.

문선명 총재가 2001년 1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세계평화축복식’을 주관하고 있다.
국내 선교에만 열중하고 있는 한국의 기성교단이 통일교의 성공을 함부로 매도하는 일은 실로 ‘우물 안의 개구리’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통일교는 미국에서 ‘매디슨스퀘어’의 성공과 ‘댄버리 수감’이라는 명암을 가지고 있다.

근대에 들어 기독교와 과학은 서로 다른 영역을 양분하고 있다. 기독교는 ‘내세(來世)’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신앙체계인 반면 과학은 ‘보이는 세계’ ‘이용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사실체계이다.

현대의 과학은 70억명에 달하는 인구 부양을 위해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필요에 부응하고 있지만 반대로 환경오염이나 생태파괴라는 반대급부를 인간에게 안겨주었다. 그래서 과학적 사고에 대한 비인간주의가 문제가 되고 있고 과학을 보완하는 사상체계를 요구받고 있다.

말하자면 과학을 이용하면서도 동시에 환경을 보호하는, 산업을 하면서도 인간으로 하여금 개인적 행복도 구가할 수 있게 하는 두 마리 토끼 잡기를 현대인은 원하고 있다. 이에 종교는 과학과 다른 이상을 내놓아야 하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현대는 종교와 과학의 새로운 융합과 통섭을 요구하고 있다.

문선명 총재가 한일월드컵 기간인 2002년 6월 서울을 찾은 ‘축구황제’ 펠레와 만나 대화하고 있다.
통일교의 ‘원리원본’ ‘원리강론’을 비롯한 ‘통일원리’는 바로 이러한 신문명시대에 새로운 대안을 내놓은 사상체계 중의 하나다. 통일교가 세계 문명사에서 주목을 받는 이유는, 서구의 많은 지식인과 기독교인들이 통일교로 들어오는 이유는, 통일교의 종교내적 주장과 사상이 세계사의 발전방향과 맞물려 돌아가는 국면에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북한의 통일은 바로 공산·민주세계의 통일이며, 냉전의 완전한 종식이며, 나아가서 세계문명의 통일이다. 또한 양분된 인류의 세계가 통합하는, 화해와 평화를 지향하는 길목에 있는 통일이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져야 ‘평화의 세계’가 달성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잘못되는 날에는 세계는 재앙을 맞을 수도 있다. 그래서 문 총재는 노심초사하였다. 이것은 공교롭게도 아시아태평양시대와 맞물려 있다.

유럽 중심의 근대는 미국으로 중심을 옮긴 뒤에 이제 아시아태평양의 일본·한국·중국으로 중심을 이동하고 있다. 미국도 대서양시대를 떠나서 태평양 연안국가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것을 두고 민족종교들은 ‘후천개벽시대’라고 말한다.

후천개벽시대라는 것이 무슨 특정종교가 표방하는 내세나 공상적인 세계가 아니라 아시아태평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를 말한다. 세계문명사의 변천으로 볼 때 기독교는 종래의 구태의연한 중세의 교부철학적 해석이나 가톨릭의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운 해석 정도가 아니라 매우 혁명적인 해석을 요구받고 있다. 현대의 존재론 철학으로 보면 신(神)은 사물 자체와 분리될 수도 없으며, 인간은 저마다 세계를 책임지는 신이 되고, 저마다 구세주가 되는 기분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는 이분법으로 분리된 시대가 아니라 하나이다. 진정으로 세계가 하나임을 깨닫게 될 때 세계의 평화가 달성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이제 제도로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제도적 종교는 권력이고, 자칫 잘못하면 종교가 기득권자의 대변자가 되기 쉽기 때문에 부단히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의 평화나 행복은 실은 거대한 건물의 교회나 사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몸을 담고 있는 ‘가정’에 있기 마련이다. 통일교의 ‘가정교회 사상’은 종교의 보편성과 달리 인간이 바탕하고 있는 공통성(일반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사적으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문명적 사명에 부응하고 선도해야 할 책임이 통일교와 한국에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은 이제 세계문명을 지도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서양이 만들어놓은 패러다임을 그냥 따라가면 되는 시대가 아니다. 문 총재는 이러한 시대의 도래를 이미 6·25전쟁 중에 읽고, ‘원리원본’을 집필하고, 통일교회를 창설하였다. 

2004년 3월1일 강원도 용평리조트를 찾은 문선명 총재가 일본인 등 식구(교인)들과 대화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통일교회는 문명적으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것을 한 단계 넘어서 “세계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이라는 것을 종교적으로 실천한 모범적 사례에 속한다.

박정진 문화평론가·종교인류학 박사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