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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선의 중국 기행-시간의 풍경을 찾아서] ① 단군 할아버지의 고향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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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11-17 09:41:45 수정 : 2011-11-17 09: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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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초원 호령하던 북위 발자취에 우리 민족의 시원이…
우리 민족의 발상지가 어디이며, 어떤 경로를 통해 한반도로 이주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자료는 없다. 그런데 시인 백석은 이 점과 관련하여 ‘북방(北方)에서’(1940.7.)란 시에서 흥미있는 상상을 펼쳐보였다. 

그는 이 시에서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渤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르를 숭가리를/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라고 썼다. 

백석의 시적 상상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오랜 시간에 걸쳐 북방 여러 지역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부여, 숙신, 발해, 여진, 요, 금 등을 떠나서, 아무르강과 숭가리강을 떠나서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왔다. 흥안령산맥과 음산산맥 속에서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쫓던 수렵생활을 접고, 흑룡강과 송화강에서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잡던 어로생활을 접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백석은 이 시에서 대담하게도 “오로촌이 멧돌(멧돼지)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라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았다”라고 말함으로써 대흥안령 일대에 살고 있는 오로촌-어룬춘(鄂倫春)족과 쒀룬(索倫)-어원커(鄂溫克)족이 우리 민족의 시원을 구성하는 사람들이란 생각을 보여주었다.

백석이 보여준 이러한 파격적 발상은 과연 허무맹랑한 것일까? 한 편의 시가 불러일으킨 강렬한 호기심 때문에 필자는 2001년 8월 어느날 충동적으로 하얼빈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대흥안령 산맥 속의 가셴둥(?仙洞) 동굴을 찾아 나섰다.

필자는 아침 일찍 자거다치행 기차를 탄 후 끝없이 펼쳐진, 대흥안령의 울창한 자작나무 숲 속을 느리게 달리는 기차 속에서 상념에 잠겼다. 독립운동을 하던 철기 이범석 장군이 이 산속에서 아편을 재배해서 수렵생활을 하던 어룬춘족에게 팔아먹었던 사실로부터 어룬춘족과 어원커족 등의 명칭이 ‘오랑캐’라는 우리말의 어원을 이루게 된 과정 등을 떠올리며 끝없는 상념에 잠겼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오랑캐’라는 말 속에는 “무찌르자 오랑캐 몇 천만이냐”라는 노래가사에서 보듯 북쪽의 침략자들이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가 묻어 있다. 그러나 민족의 명칭을 음차한 이 말은 원래부터 부정적 의미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북위 시절에 우뤄허우국(烏洛侯國, 오라크국)이라 부르고, 원나라 시기에 우량하(兀良哈)라고 음차한 사람들, 요나라 시기에 간랑가이(幹朗改), 금나라 시기에 우디가이(烏底改) 등으로 음차한 사람들, 다시 말해 외흥안령 일대 숲속에 살던 사람들을 가리키던 명칭이 ‘오랑캐’의 어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음차의 연속성을 대흥안령 일대에 살고 있는 어룬춘족과 어원커족의 명칭에서 지금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한 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앞에서 보았듯 백석은 ‘오랑캐’라는 말의 어원과 관련된 북방 민족들을 가리켜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 했다.

아리허진에서 가셴둥 동굴을 찾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의외로 길은 산맥 속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평탄했으며, 택시 운전사는 필자가 그곳에 갈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양 익숙하게 동굴 바로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렇게 필자는 우리 민족의 한 발원지일지도 모르는 동굴 앞에 섰다. 그리고 아직도 사람이 살았던 자취가 완연하게 남아 있는 천연동굴 안에서 수천년의 시공을 가로지르는 흥분에 잠기며 오랫동안 서 있었다. 

443년 태무제가 이창을 보내 새긴 비문. 동굴 입구 왼쪽 벽에 있다.(좌 사진) 동굴 정면의 오른쪽에서 본 입구 모습.
가셴둥 동굴에서 살았던 1000명 가까운 수렵민족은 후일 북위(北魏) 제국을 건국하게 되는 탁발부족(拓拔部族)으로 선비족(鮮卑族)의 일족이다. 이 탁발족은 대흥안령 산맥 일대에서 수렵생활을 하다가 BC 22∼55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흉노족이 물러간 후룬호(呼倫湖) 지역으로 내려왔다. 불안정한 수렵생활을 버리고 후룬호 일대의 비옥한 후룬베이얼 초원에서 좀 더 안정적인 유목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유목생활을 통해 역량을 키운 탁발부족은 초원의 부족들을 흡수하면서 몽골 초원을 서쪽으로 가로질러 현재의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 일대에까지 진출했으며, 마침내 386년에는 핑청(平城)을 수도로 삼아 북위를 건국했다. 불교문화를 중국에 정착시키고 수제국과 당제국의 모태가 됨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 북위제국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북위의 태무제 시절 4500여리나 떨어진, 흥안령 일대의 오라크국에서 온 조공사절이 황제의 선조들이 살았던 장소가 흥안령 산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그 처분을 물었다. 『위서(魏書)』의 편찬자인 위수(魏收)는 여기에 답해 태무제 탁발도(拓拔燾)가 중서시랑 이창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동굴 벽에 새겨놓았다고 하면서 축문의 내용까지 기록해 놓았다. 

그렇지만 위수가 남북 90보, 동서 40보, 높이 90척의 크기의 석실이라는 구체적 설명까지 남긴 이 동굴의 실재성을 믿는 후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탁발 선비족이 거주했던 가셴둥 동굴이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메이원핑(米文平)이란 사람의 고집스러운 집념 덕분이었다. 후룬베이얼의 신문기자였던 그는 고독한 탐색 끝에 1980년 가셴둥 동굴의 벽에서 탁발도(拓拔燾)라는 이름이 선명한 비문을 찾아냈다. 사서의 기록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며 흥안령 산맥을 헤맨 한 사람의 집념이 세계 고고학상의 대발견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리하여 탁발 선비족이 수렵민족에서 유목민족으로, 유목민족에서 농경민족으로 전화해간 과정이 명백한 사실로 입증되었다.

필자는 탁발 선비족의 이동경로를 쫓아 흥안령 산맥을 서쪽으로 내려와 후룬베이얼 초원의 진장한(金帳汗) 몽골 부락을 찾았다. 탁발족이 수렵생활을 청산하고 유목생활을 처음 시작한 후룬베이얼 초원은 참으로 광대하고 아름다웠다. 한반도의 절반 크기에 육박하는 이 8월의 초원 위에서는 굽이굽이 감돌며 흐르는 시냇물과, 푸른 바탕에 하얀 수를 놓고 있는 수만 마리의 양떼와, 밤 9시나 되어야 비로소 어두워지는 붉은 하늘과, 주먹 만한 크기로 빛나는 별이 연출해내는 기막힌 풍경이 한 차례 펼쳐지고 있었다. 이런 낭만적 풍경 때문에 필자는 밤낮을 잊어버린 채 취한 발걸음을 초원 위로 옮기며 백석을 이어받아 흥안령의 동쪽으로 내려와 남하한 사람들에 대한 상상을 펼쳐보았다. 

진장한 몽골 부락에서 내려다본 초원과 모얼거러(莫爾格勒) 강의 모습
비교적 최근까지 수렵생활을 하며 살았던 퉁구스계의 어룬춘족과 어원커족들이 모두 곰을 숭상하고 있고, 이들의 선조들이 생활했었던 가셴둥 동굴이 대흥안령 산맥 속에서 발견된 사실은 단군신화로 상징되는, 우리 민족의 시원에 대해 의미있는 유추를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단군신화는 하늘의 천신족 환웅과 지상의 웅녀가 결합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동북아시아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천강신화의 일종이다. 탁발 선비족에게는 성무황제 힐분(詰芬) 시절에 음산산맥 부근으로 이동했으며, 여기에서 힐분이 천녀(天女)와 동침하여 북위 황제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신원황제 역미(力微)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탁발부족이 당시 몽골 초원에서 쇠퇴하던 흉노의 남은 무리를 흡수한 이야기라 할 수 있으며, 우리의 단군신화와 비슷하다. 환웅의 하강이 외래 집단의 이주·정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고, 곰과 호랑이로 상징되는 토착종족 집단 중 곰으로 상징되는 집단과 함께 새로운 민족질서를 만든 이야기라고 유추한다면 양자는 대단히 유사한 것이다. 중국의 고문헌들에는 ‘조선(朝鮮)’이란 말은 ‘식신(息愼)’, ‘숙신(肅愼)’, ‘주신(株申)’, ‘여진(女眞)’과 동일한 음이며, ‘조’는 동방을 ‘선’은 선비산(鮮卑山)을 가리킨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이 대흥안령의 동쪽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가셴둥 동굴은 우리와도 무관한 곳이 아니다. 우리 단군할아버지의 조상들도 그곳 어디의 동굴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인하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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