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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찾다] ① 세계로 소통하는 문, 조선시대 외국어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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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11-07 11:40:00 수정 : 2015-05-18 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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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마을' 원조는 조선시대 우어청 오늘부터 수요일자 이 지면에 ‘홍윤기의 역사기행’과 함께 격주로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를 연재합니다. 작금의 사건이나 트렌드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유사하게 발견됩니다. 역사는 반복되면서 느리게 진보합니다. 고금을 넘나드는 소통에서 우리 사회를 성찰하고 새로운 길찾기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인 신병주씨는 ‘조선 중후기 지성사연구’ ‘조선 최고의 명저들’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등을 펴냈습니다.

초등학교의 외국어학습 프로그램, 외국어 고등학교, 국제대학원, 대학교 교수 임용에서의 영어 구사 능력 강조, 취업 시험에서 이제는 피할 수가 없는 길이 된 외국어 면접…. 태어나면서부터 영어 정도는 구사해야 한다는 자조 섞인 푸념이 허풍이 아닌 현실이 될 정도로 어느덧 외국어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수품처럼 되었다. 영어는 물론이고 중국어, 일본어 수요도 만만치가 않고, 외국어 구사 능력이 성공의 지름길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아간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외국어는 어떻게 인식되었을까? 예상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도 체계적인 외국어 학습이 이루어졌음이 우선 눈에 띈다. 과거시험 중 기술관을 선발하는 잡과(雜科)에 역과(譯科)를 두어 외국어를 구사하는 통역관을 뽑았다. 수요가 있으니 당연히 오늘날과 같은 외국어 학습 교재가 있었다. 중국어 교본인 ‘노걸대(老乞大)’와 ‘박통사(朴通事)’를 비롯하여 일본어 학습서인 ‘첩해신어(捷解新語)’ 등이 그것이다.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인 사역원(司譯院)도 있었고, ‘통문관지(通文館志)’라는 책에는 이름을 날린 역대 역관(譯官)들의 활약상이 담겨 있다.

#1. 미스터 중국인, ‘노걸대’

조선시대의 중심 외국어는 당연히 중국어였다. 다만 모든 백성에게 중국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중국에 파견되는 사절단을 수행하는 역관들을 중심으로 중국어 학습이 이루어졌다. 물론 지식인층 중 상당수는 중국어를 능숙히 구사하였다. 대표적으로 세종 시대를 빛낸 학자 신숙주는 중국어, 여진어, 몽고어, 일본어에 두루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어 학습을 위해서는 교재가 필요했다. 중국어 회화의 교재로는 ‘노걸대’가 있었다. ‘노’는 상대를 높이는 접두어로서, 우리말의 씨(氏), 영어의 미스터(Mr)쯤 된다. ‘걸대’는 몽골인이 중국인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3명의 고려 상인이 말과 인삼, 모시를 팔기 위해 중국에 다녀온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상황을 적어 놓은 책이다.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권은 완전히 회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노걸대’에는 말을 사고 파는 법, 북경에 도착하여 여관에 드는 방법,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을 소개하는 방법 등이 중국어로 소개되어 있는데, 그야말로 실무에 필요한 실용 회화책이라 할 수 있다.

‘노걸대언해’는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쉽게 중국어를 배울 수 있게 한글로 해설한 책으로, 요즈음으로 치면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적은 번역서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어가 보급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책으로, 우리나라 중세 국어의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된다.

‘노걸대’는 몽골어로도 번역, 간행되었다.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는 몽고어로 ‘노걸대’의 내용을 싣고 우리말로 그 음을 달아 풀이를 해 놓은 책이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이미 멸망했지만 언젠가 몽고어가 필요한 시기가 올 것으로 판단하고 몽고어 학습에도 신경을 썼던 조선 후기의 시대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지난 5월 몽골 대통령 부부가 규장각을 방문했다. 방문 목적은 단 하나, 바로 ‘몽어노걸대’를 보기 위함이었다. 필자는 몽골어 학습에 기울였던 선조의 열정이 현대 한국과 몽골의 우호 협력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노걸대’와 함께 대표적인 중국어 학습서로 꼽히는 책은 ‘박통사’이다. 통사가 역관의 직책인 만큼 ‘박씨 성을 가진 역관’이라는 뜻이다. 노걸대’가 상인의 무역활동을 주제로 하는 ‘비즈니스 회화’에 가깝다면, ‘박통사’는 중국의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전당포에서 돈을 빌리는 상황, 공중목욕탕의 요금과 때밀이, 차용증 쓰기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내용들이 망라되어 있다. 특히 ‘박통사’는 ‘노걸대’보다 고급 단계의 언어를 반영하고 있어서, 중국어와 우리말의 생생한 모습과 함께 풍속 및 문물제도까지 접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박통사언해’는 ‘박통사’를 우리말로 풀이한 책이다.

◇박통사언해◇박통사언해 본문◇통문관지(왼쪽부터)


#2. 일본어 교재, ‘첩해신어’

조선은 초기부터 일본과 교린정책에 입각한 외교관계를 맺고 교류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일본을 이적(夷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실용적인 차원에서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정보 수집을 위해 일본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조선시대 외국어 전담 관청인 사역원에서는 일본어 역관들을 교육하기 위해 일본어 학습용 교재인 ‘첩해신어’를 1676년 널리 간행하였다.

1415년(태종 15) 사역원이 설치된 후 처음에는 한학(漢學)과 몽학(蒙學)만 개설되었다가 나중에 왜학(倭學)이 개설되었기 때문에 일본어를 ‘신어(新語)’ 또는 ‘신학(新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첩해신어’라는 제목은 ‘신어, 즉 일본어를 빨리 해독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첩해몽어(捷解蒙語)’라는 책도 있는 것을 보면 ‘첩해’가 당시 회화책에 관용구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외국어 학습이 대부분 그렇지만 ‘첩해신어’에서도 일본어를 외우는 능력을 가장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영조 때의 역관 현경재라는 사람이 쓴 역과 시험 답안지인 ‘왜학시권(倭學試券)’을 보면, ‘첩해신어’에서 여섯 부분을 정해 외워서 쓰도록 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어학 능력을 중시했던 면모가 나타난다.

#3. 외국어 학습의 첨병, 역관

역관은 조선시대 외국어 통역을 전담하는 관리를 말한다. 요즈음의 외교관이나 통역사의 역할을 한 인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사역원에서 집중적으로 역관을 양성했다. 사역원에서는 4대 외국어인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를 배웠다. 한학청(漢學廳), 몽학청(蒙學廳), 청학청(淸學廳), 왜학청(倭學廳)이라 불리는 각 관청에서 외국어 학습을 전담하였다. 또 우어청(偶語廳)이라 하여 하루 종일 외국어로만 대화를 주고받도록 한 순수 회화 교실이 있었다. 요즈음 곳곳에서 생겨나는 ‘영어마을’ 같은 곳의 원조인 셈이다. 당시 제1외국어는 당연히 중국어였고, 사역원에서도 한학청의 규모가 가장 컸다.

기술직이 천시됐던 조선시대의 역관은 신분상 중인에 속하였다. 중인 신분은 세습되었으므로, 대개 역관은 한 가문에서 연이어 배출되는 일이 많았다. 밀양 변씨, 천녕 현씨, 우봉 김씨 등은 대표적인 역관 가문이었다. 역관은 추천에 의하여 심사를 받고 적격자로 판정을 받으면 사역원에 들어가 본격적인 외국어 학습을 하였다.

그러나 사역원에 들어갔다고 해서 바로 역관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엄격한 수련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역원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하고 매월 2일과 26일에는 시험을 쳤다. 3개월에 한 번씩은 지금의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 해당하는 원시(院試)를 쳤다. 수련 과정을 거친 후에는 잡과(雜科)를 치렀다. 문과처럼 3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의과, 역과, 율과 등으로 구성된 잡과 중 역관은 역과에 응시했고, 역과의 초시와 복시에 모두 통과해야 역관이 될 수 있었다.

역관이 조선시대 일선 외교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탄탄한 교육과정과 시험 제도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외국어 학습을 실시하고 우수한 외교관을 배출하는 시스템을 확보한 모습에서, 흔히 조선사회를 비판하는 개념인 고립이나 폐쇄라는 용어는 쉽게 떠올릴 수가 없다. (다음에 계속)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shinby@snu.ac.kr



◇통문관지에 등장한 역관 홍순원은 조선 태조를 정적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명나라 사료를 바꾸는데 공을 세웠다.


''통문관지''와 홍순언의 외교비사

‘통문관지’는 조선 숙종 때 사역원의 역관인 김지남과 그의 아들 김경문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책으로, 외교 및 역관 담당 관청인 사역원의 연혁과 관제(官制), 고사(故事), 사대교린(事大交隣)에 관한 외교 자료를 정리한 책이다. 사역원은 고려시대에는 통문관으로 불렀기 때문에 제목이 ‘통문관지’가 된 것이다. 특히 ‘통문관지’에는 ‘인물’이란 항목을 설정하여 최세진, 홍순언, 김근행 등 역대 주요 역관들을 서술하는 것이 주목된다. ‘통문관지’에 기록된 홍순언의 행적을 잠깐 살펴보자.

“홍순언은 중국의 통주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하룻밤 인연을 맺고자 했다. 그런데 여인이 소복 차림인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여인은 부모님의 장례를 치를 돈을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팔고 있다고 했고, 여인의 말을 들은 홍순언은 선뜻 300금을 내주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여인이 이름을 묻자 순언은 성만 알려주고 나왔다. 훗날 명나라 예부시랑 석성의 첩이 된 이 여인은 홍순언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통문관지’ 권7)

이어 ‘통문관지’에는 중국 여인과 맺은 이 인연은 홍순언이 조선 최고의 외교 현안인 종계변무를 성공시키거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참전을 이끌어내는 데 큰 힘이 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물론 여인과의 인연도 일부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홍순언이라는 통역관의 뛰어난 역량이 명나라와의 외교 협상을 성공으로 이끈 것으로 여겨진다. 홍순언처럼 묻혀졌던 인물이 ‘통문관지’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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