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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는 후배를 만났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는 우는소리를 했다. 등단 연차로 보나 나이로 보나 한창 왕성하게 창작할 시기인데 소설이 통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슬럼프냐고 묻자 아니라고 했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예요. 문득 깨달았는데 저에게는 작가로서의 소질이 부족한 거 같아요. 소질이 아예 없다면 포기라도 할 텐데 어중간하게 있으니 포기도 쉽지 않고요. 객관적으로 저는 창의력도 부족하고 문장력도 그냥 그렇고 그러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써야 할 텐데 솔직히 정신력도 형편없거든요.

후배는 그럼에도 언제나 자신이 소설가임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산책할 때도, 장을 볼 때도, 씻을 때도 먹을 때도, 지인의 장례식에 가고 결혼식에 갈 때도 저는 계속 소설에 대해 생각해요. 아, 저런 인물을 소설에 등장시키면 재미있겠네. 저런 장면을 소설에 삽입하면 근사하겠네. 저런 대사를 소설에 넣으면 정말 그럴듯하겠네, 하고요. 문제는 그렇게 생각은 많이 해도 그 생각들이 실제 집필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거지요. 쓸데없이 생각만 하느라 허비하는 시간에 차라리 아무 생각 말고 한 줄이라도 쓰는 게 나을 텐데.

그런 다음 후배는 스스로 자신의 말을 반박했다. 하지만 저는 사실 소설 쓰는 사람에게 쓸데없는 것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쓸데없이 생각만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은 쓸데없이 생각만 하느라 허비하는 시간에 대해 잘 알고, 계획만 세우다 번번이 포기하는 사람은 계획만 세우다 번번이 포기하는 상황에 대해 잘 알고,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천은 뒷전인 사람은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천은 뒷전인 사람에 대해 잘 아는 법이니까요. 그것들이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소설에 반영될 수 있으니 쓸데없는 게 아니잖아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논리정연한 하소연에 딱히 끼어들 필요도 그럴 틈도 없었다. 근데 선배, 그러면 이론상으로 소설가에게는 만사에 불평할 일이 하나도 없어야 하고 세상에 소설가만큼 좋은 직업도 없어야 하는 거 아녜요? 현실은 왜 안 그럴까요? 제가 말해놓고도 자신의 유체이탈식 화법이 어이없었는지 후배는 말끝에 가볍게 실소했다. 에이, 그러니까 제 결론은요, 정신 차리고 소설 열심히 쓰자 뭐 그런 거예요. 갑자기 논리가 비약되며 성급하게 결론으로 치달았으나 그 결론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나는 잠자코 따라 웃었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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