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중한 시기 대규모 파업 부적절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1861∼1865 재임)이 1861년 미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노동은 자본에 선행하며 그와 독립적인 것이다. 자본은 노동의 과실일 뿐이며 노동이 먼저 존재하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은 자본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보다 훨씬 큰 배려를 받아 마땅하다.” 이보다 노동의 일차적인 특성을 잘 규정한 구절이 많지 않다고 생각된다. 역설적인 것은 노동의 원초적인 위치가 자본이라는 제2의 생산수단을 축적하기 시작하면서 흔들리게 된 사실이다.
유럽의 경제사에서는 16세기를 훗날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으로 가는 근대가 시작된 분수령으로 본다. 서양의 역사에서 매우 큰 변화들이 그 세기에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현대적인 의미의 노동, 링컨이 가리키는 노동, 산업혁명의 밑거름이 된 노동이 탄생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러나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상이 오늘날의 그것과 유사했으리라 생각한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임금은 겨우 생존 수준이었고 오염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환경은 극도로 열악하였다. 주거환경과 위생 또한 최악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이와 같이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착취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가 노동조합 운동이다.
이상적으로 말해 모든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그에 참가함으로써 스스로의 권익을 찾을 수 있어야만 한다. 잘 운영될 때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의 건전성을 담보하는 하나의 축이 된다. 그러나 노동조합 출현의 배경을 상기하다 보면 지금 이 나라의 노동운동이 과연 노동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조직화된 노동운동은 그 의미를 상실한 지가 꽤 되었다. 이익집단이 되어 자기들만을 위한 부당한 요구와 정치투쟁을 일삼는다. 오죽하면 ‘귀족노조’라고 부르는가.
이제는 조합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료 노동자를 핍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노동조합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노동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의 사회적 문제는 자본보다는 오히려 노동운동에 있는 것 같다. 자본의 부당함은 쉽게 드러나고 수정되는 편이다. 제도적으로도 크게 개선되었고 그런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다. 문제는 조직화된 노동, 곧 노동조합이다. 그들의 부당함에는 법과 공권력도 통하지 않는다. 지난 정권들의 방치와 비호를 거쳐 노동조합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었다. 노동을 생각하지 않는 자본이 성공할 수 없듯이 자본을 배려하지 않는 노동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사실을 역사가 가르치고 있음을 모르는가.
다시 대규모 파업이란다. 법치를 세우라! 이는 지난 3월9일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이 대통령에게 내린 명령이다. 지난 5년 동안 무너질 대로 무너진 법치와 기강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이 나라의 미래는 어둡다. 이제는 심지어 고상한 이름의 ‘노란봉투법’(노동조합의 파업으로 발생한 손실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내용 등을 담은 법안)까지 요구한다. 때려 부수고 가로막고 사업장을 마비시켜도 면죄부를 달라고, 불법의 피해에 대한 법적 사면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런 광기가 어디 있나. 이것이 무법천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경제활동 인구의 10%도 안 되는 노동조합이 90% 이상의 노동자를 볼모로 삼아 폭력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지금 이 나라의 노동조합은 폐기되어 마땅하다. 법치를 세움으로써 광야에 선 90% 이상의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운동이 떨쳐 일어나도록 해야만 한다. 이 엄중한 시기에 파업이라니. 다시 한번, 법치를 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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