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법 절차 상관없이 배상할 수 있어
거대 기업 중심 투기 수단화 사례 급증
한국 정부 상대로 제기된 것만 총 10건
현재 6건 진행 중 … 청구액만 2조 달해
스페인은 최근 10년 간 53건 청구 받아
일부 국가에선 ISDS 제도 폐지 움직임
美·캐나다·멕시코, 조항 삭제·제한 허용
유럽사법재판소 ‘유럽법 위반’ 무효 판결
“정부 조치가 정당하고 미국 투자자에게 비차별적인 경우에는 국제투자분쟁(ISDS) 피소 가능성은 사실상 없습니다.”
2011년 11월9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을 앞두고 ISDS가 독소 조항이라는 야당과 시민단체 지적이 이어지자 기획재정부는 ‘ISDS, 우리에게 필요한 제도입니다’라는 제목의 책자에서 이렇게 반박했다. ISDS가 투자유치국 정부의 부당한 처분에 대해 외국인 투자자를 보호하는 제도인 만큼 ‘시장경제원칙을 따르고 안정적인 법체계를 갖추고 있는’ 한국으로선 우려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1년 뒤인 2012년 11월21일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는 한국 정부에 6조원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ISDS를 제기했다.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첫 ISDS였다. 외환위기 여파로 경영 상황이 악화한 외환은행을 2003년 헐값에 사들인 뒤 4조6635억원의 차익을 챙겼음에도, 정부의 매각 승인 지연으로 더 많은 이익을 남기지 못했다는 게 배상 청구의 이유였다. 한국 정부와 론스타 사이 중재를 맡은 판정부는 10년 만인 지난달 31일 정부의 일부 책임을 인정하며 이자 포함 3000억여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20년간 지속한 론스타와의 악연은 일단락됐지만,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ISDS 6건이 진행 중이다. 추가로 제기될 가능성이 있는 중재까지 감안하면 막대한 세금이 외국인 투자자에게 지급될 수도 있다. ISDS가 투자자 보호라는 본래 취지가 아닌 글로벌 자본의 투기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제도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외 투자자 보호 위해 설계된 ISDS
ISDS는 양자간 투자협정(BIT)이나 FTA상 ‘투자자 보호 의무’를 위반해 투자자가 손해를 입은 경우 투자국을 상대로 제기할 수 있는 중재를 말한다. 판정 기준은 투자유치국이 국내법을 위반했는지가 아니라 투자자 보호 조항을 어겼는지 여부다. 정부가 국내법에 따라 적법한 처분을 했더라도 투자자에게 손해를 배상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투자자 보호 조항에는 주로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 내국민 대우, 최혜국 대우, 직접 또는 간접 수용 금지 등이 포함된다.
ISDS는 일반 재판과 달리 투자유치국과 해외 투자자가 민간인인 제삼자를 선임해 판단을 맡긴다. 3심제인 소송과 달리 중재는 단심제로 결정된다. 중재 과정과 결과는 ‘투명성(정보공개) 조항’이 있는 경우에 공개되는 게 일반적이다. 세부적인 내용은 각국이 체결한 BIT나 FTA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해당 협정에 ISDS를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

ISDS가 투자자에게 유리하게 설계된 배경을 살펴보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국가들이 속속 독립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일부 국가들이 식민지 자본을 국유화하고 나서자 과거 제국주의 국가에서 자국 투자자 또는 자본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제도를 고안해 낸 것이다.
ISDS는 투자자 보호를 명분으로 만들어졌지만 투자유치국에는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투자자가 천문학적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사례가 늘었고, 이에 투자유치국 정부가 소극적인 공공정책을 펼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외국인 투자자가 과세 처분이나 친환경, 보건 정책처럼 공공성을 띠는 정책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초국적 담배회사 필립모리스는 2011년 호주 정부의 담배 광고 규제 정책 때문에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해 논란이 됐다.
근본적으로 정부의 잘못을 판단할 권한을 민간인 신분의 외국인에게 준다는 점에선 사법주권을 침해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중재 증가 추세… ISDS 제거 움직임도
ISDS가 처음 도입된 1960년대 이후 국가간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ISDS 사례도 늘고 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지난 7월 발표한 ISDS 현황을 보면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제기된 ISDS는 총 1190건이다.
2000년 무렵 신규 ISDS는 연간 10건 안팎에 불과했다. 그러나 해마다 꾸준히 늘어 지난해에는 68건의 새로운 ISDS가 시작됐다. ISDS 개시 사실조차 비공개인 경우가 많아 실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정부를 상대로 지금까지 제기된 ISDS는 총 10건이다. 이 중 론스타 포함 4건은 종료됐지만 6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남은 6건의 청구액을 더하면 2조원에 달한다. 중재 제기에 앞서 상대 정부에 협상 의사가 있는지 타진하는 ‘중재의향서’를 보낸 경우만 6건이라 향후 ISDS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지난 10년간 가장 많은 ISDS 청구를 받은 국가는 스페인(53건)이다. 스페인 정부가 재생에너지 기업에 대한 보조금을 삭감하자 스페인에서 사업을 벌이던 전 세계 기업들이 무더기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스페인뿐만 아니라 미국과 프랑스, 핀란드 등 다수의 선진국들도 지난해 ISDS 피청구국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 정부는 ISDS가 ‘글로벌 스탠더드’라며 투자 유치와 투자자 보호를 위해 불가피한 제도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반대의 흐름도 포착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개정이다. 미국과 캐나다는 2018년 NAFTA를 개정하며 양국 사이의 ISDS 제도를 삭제했다. 미국과 멕시코는 ISDS를 제한적으로만 허용하기로 했는데, 공정·공평 대우를 이유로는 ISDS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했다.
유럽사법재판소는 2018년 유럽연합(EU) 국가들 간의 ISDS를 유럽법 위반으로 무효라고 판결했고, EU 회원국들은 2019년 회원국 간 BIT를 종료했다.
◆“공정·공평 위반 판단 범위 넓어… 공론 통해 보완”
한국 정부가 론스타에 3000억여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정이 나오면서 국제투자분쟁(ISDS) 제도를 보완하거나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한상사중재원에서 중재인으로 활동한 곽경직 변호사(법무법인 KNC)는 19일 “국내에서 ISDS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제도가 도입된 측면이 있다”면서 “이제라도 일반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 제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론스타 판정에서도 한국 정부가 위반했다는 지적을 받은 공정·공평 대우 조항을 구체화하고, 판정문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통상위원회 부위원장인 노주희 변호사(법무법인 수륜아시아)도 “공정·공평 대우 위반을 판단하는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 외국인 투자자가 이를 활용할 여지가 있다”며 “오래된 BIT(양자간 투자협정) 조항 등을 살펴보고 보호 대상을 구체화하거나 과도한 보호 조항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노 변호사는 ISDS로 피해를 보고 있는 국가들과 연대해 ISDS 폐지 흐름을 만들자고도 제안했다. 우선 50여곳의 해외 기업과 중재 절차를 진행 중인 스페인과 한국 사이의 ISDS 조항을 없애고 나면 다른 국가와도 관련 논의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 민사재판 등에서 피고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새로운 소를 제기하는 것처럼 투자유치국도 기업을 상대로 반소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투자분쟁 역학관계의 재조정 - ISDS 절차 반소 제도 도입 움직임과 법적 함의’라는 논문을 통해 “외국인 투자자가 투자유치국 정부를 제소하는 것만 허용하는 일방통행식 ISDS 절차를 바꿔 투자유치국 정부도 외국인 투자자에 대해 법적 주장을 동시에 제기할 수 있는 반소를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반소 제도 도입의 근본 취지는 ISDS 절차에서 힘의 균형 회복을 통해 투자유치국 정부의 정당한 정책 주권을 보호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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