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문제로 고심하고
스트레스 받던 학창시절
모티브로 극화해 완성
14편 소설마다
기억의 파편 녹여내
모처럼 즐겁게 써

지난해 ‘예스24’에 엽편소설을 연재할 무렵이었다. 무엇을 쓸까, 하고 책상 앞에서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고민했다. 불현듯 한 이미지와, 그 이미지에 딸린 생각들이 떠올랐다. 친구 문제로 고심하고 스트레스를 받던, 친구와의 관계에서 솔직할 수 없었던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하던 한 여학생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학창시절의 서툴렀던 경험과, 당시의 감정을 모티브로 가공하고 극화해서 써 보자라고 생각했다. 소설가 최은영의 짧은소설집 ‘애쓰지 않아도’(마음산책) 표제작은 이렇게 우리 곁에 다가왔다.
작품은 엄마가 집을 나가면서 서울 고등학교로 진학한 ‘나’가 반에서 잘 나가는 친구 유나와 그녀의 그룹에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나는 수학여행에서 술을 먹고 유나에게 불우한 가정사를 고백하지만, 내 이야기는 곧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다. 나는 유나에게 증오감을 느끼고 나서야 이전 자신의 감정이 열등감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때 우리는 사랑과 증오를, 선망과 열등감을, 순간과 영원을 얼마든지 뒤바꿔 느끼곤 했으니까. 심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다는 마음이 모순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니까.”(31쪽)
마음을 어루만지는 맑고 순한 서사와 그럼에도 폭력에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온 소설가 최은영이 짧은소설집을 들고 돌아왔다. 김세희 작가 그림이 함께 담긴 이번 소설집에는 짧은소설 열세 편과 단편소설 한 편이 담겨 있다. 각 소설에는 자신의 기억 파편이 조금씩 녹아 있다.

최은영은 왜 눌리고 가려진 여리고 소중한 마음들이 일어나서 활보하는 짧은소설을 써야만 했을까. 그는 앞으로 어떤 소설 세계를 향해 나아갈까. 최 작가를 지난 6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표제작 ‘애쓰지 않아도’에서 유나는 나의 비밀을 퍼뜨렸는데, 유나는 왜 그랬을까.
“저의 고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지금의 제 기준에선 해서는 안 될 행동과 말과 미숙한 면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아직 다 완성되지 않은 인간들이어서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행동하는 게 다 있었던 것 같다. 유나도 아마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그러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숲의 끝’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핀란드에 들어가지 못한 ‘나’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그동안 만나지 않아온 친구 지호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쓰인 소설이다. 열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서 핀란드에 간 나는 지호의 도움으로 학교생활에 적응한다. 하지만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쫓기듯 귀국해야 했던 나는 한국에 소중한 사람이 많이 있어서 돌아가야 한다고 지호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 졸업 여행 때 나는 숲속에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지호를 기다리지만, 지호는 오히려 내가 자신을 버리고 갔다고 화를 낸다.
―소설에서 나는 왜 지호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지호는 또 왜 내가 자신을 기다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을까.
“소설에서 나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부끄럽고 싫으니까 그냥 허세를 떨었던 것 같다. 저를 포함해서 애들이 하는 솔직하지 못한 행동이었을 것 같다. 제가 길치여서 그런지 몰라도, 지호가 숲에서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길이 사실 다른 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호는 분명히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갔는데 내가 없으니까, 자신을 두고 가버렸구나, 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밑바탕에는 내가 한국으로 가게 되면서 자신이 혼자 버려졌다는 느낌, 감정이 중첩돼 상처를 받았을 것 같다.”
‘손 편지’는 최근 점장을 했던 미나가 가계가 폐쇄되면서 이전 점장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의 소설이다. 점장은 미나가 처음 아르바이트를 할 때 여러 가지로 친절하게 챙겨주지만, 미나는 그때마다 각박하게 반응한다. 미나와 점장은 ‘지금 맞는 아이가 자라서 폭력 어른이 됩니다’라는 배려 없는 공익광고를 함께 피해서 통근한다. 미나는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할머니 모습에서 자신과 점장의 모습을 본다. “사람의 마음은 좀처럼 지치지를 않나 봐요, 자꾸만 노력하려고 하고, 다가가려고 해요. 나에게도 그 마음이 살아 있어요.”(163쪽)
―이 작품은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인지.
“언젠가 울고 있는 아이 사진이 담긴 ‘지금 맞는 아이가 자라서 폭력 어른이 됩니다’라는 공익 광고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광고를 만든 사람들이야 아이를 때리는 어른들이 광고를 보고서 아이를 때리지 말아야지, 하는 것을 의도했겠지만, 아이를 때리는 사람들에겐 그 정도의 양심이 없다. 너무 순진하고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폭력을 당한 아이들이 그 광고를 보고서 자신들의 미래를 너무 어둡게 생각할 것 같았다. 여러 사람이 ‘컨펌’을 해서 그 광고가 올라갔을 텐데, 너무 무감각한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어디엔가 적어놨는데, 어릴 때 맞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돼서 퇴근해서 집에 가려다가 지하철에 그 광고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돌아서 가는 장면을 떠올리게 됐다.”

―소설집 전체에 마음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글쎄요. 한국 사회가 사람이 가진 마음이라든지 상처라든지 그런 감정에 대해서 세심하게 돌아보는 그런 사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음 같은 것은 집어치우고 무조건 효율적으로만 가야 된다는 사고방식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다. 마음을 드러내서 말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듣고 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마음 아픈 사람들이 많다. 매일 얼굴을 보고 서로를 안다고 생각해도 마음을 감춰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결국은 곪게 된다. 우리 모두 마음이라는 것이 있고 그건 되게 소중한 거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감정이 많은 건 나쁜 게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부정적인 감정은 나쁜 거야, 하며 사회가 효율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그런 감정들이 되게 소외돼 왔는데, 아니야 나쁜 감정은 없어 그냥 존재할 뿐이고 나쁘지 않아, 하고 얘기하고 싶었다.”
1984년 광명에서 태어난 최은영은 2013년 ‘쇼코의 미소’로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장편소설 ‘밝은 밤’ 등을 펴냈다. 그 사이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허균문학작가상, 김준성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한국일보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앞으로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그때 은희경 선생 소설을 읽었다. 시계 끈에 향수 냄새가 배었는데, 그 냄새를 맡으니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는 식의 장면을. 저는 은 선생을 기억할 때마다 그 순간이 생각난다. 작가가 자신도 모르는 한 사람의 인생에 딱 들어가게 되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 몇 살 때 최은영의 소설에 어떤 부분을 읽었던 게 생각난다, 라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기억되면 좋을 것 같다.”
이상하게도, 이날 인터뷰를 하는 내내 건물 밖에서는 모양을 알 수 없는 바람이 불한당처럼 끊임없이 건물의 창이며 기둥, 난간을 때렸고, 어마어마한 데시벨로 휘윙, 하는 소리를 쏘아 보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인터뷰 내내 그 바람소리를 전혀 듣지도 느끼지도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 어마어마한 데시벨의 바람소리를 나중에 녹취를 푸려고 녹음기를 켰을 때에야 알게 됐다. 왜 그랬을까.
참으로 이상하게도, 기자는 어느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며 그의 표정에서 온통 눈물이 떨어지는 느낌에 휩싸였다. 알 수 없는 어떤 마음에 푹, 젖어 있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말 속에 담긴 그의 마음, 그 마음을 어루만지는 맑고 순한 서사 때문이었을까. 다음날, 마음은 괜히 불한당 같은 바람만 탓하고, 내력 없이 뒤늦게 오는 감각의 게으름만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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