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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통스캔들 일으킨 정승 황희… 살림꾼이었던 유학자 이황… 사료에서 건져낸 소소한 사랑·사람 이야기

입력 : 2021-07-31 02:10:00 수정 : 2021-07-30 18: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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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밑줄친 한국사
역사 속 시·노래로 남은 연애사건 발굴
사별한 아내의 사부곡·정철 연애시 등
옛사람의 발자취에 묻어난 로맨스 담아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조선=가부장적 사회’ 통념에 이의제기
“조선 남성들은 살림꾼” 구체 사례 제시
퇴계, 장애 아내 대신해 안살림도 챙겨
최근 한국 역사 속 연애를 다룬 ‘사랑에 밑줄친 한국사’와 조선시대 남성들이 살림하는 모습을 담은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등 특정분야를 세밀하게 다룬 미시사 책자가 잇따라 출간됐다. 사진은 조선시대 청춘남녀들이 꽃놀이를 하러 떠나는 장면을 담은 신윤복의 그림 ‘연소답청’(왼쪽 사진)과 조선 남성들이 일하는 모습을 담은 김홍도의 ‘쌍겨리’. 세계일보 자료사진

사랑에 밑줄친 한국사/이영숙/뿌리와이파리/1만8000원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정창권/돌베개/1만5000원

 

1998년,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된 안동시 정상동에서 주인 없는 무덤을 이장하던 중 400여년 전 남성 시신과 함께 저고리, 치마, 부채, 미투리 등의 부장물이 출토됐다. 무덤 속 망자의 가슴을 덮은 한지에는 절절한 사연이 쓰인 편지도 함께 발견됐다. ‘원이 아버지에게, 아내가’로 시작되는 편지에는 망자에 대한 그리움과 혼자 남겨진 서러움, 생전에 함께했던 여운이 가득했다.

“자네 여의고 아무래도 내 살 힘이 없으니 쉬 자네한테 가고자 하니 날 데려가소. 자네 향해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방법이 없으니, 아무래도 서러운 뜻이 그지없으니, 이 내 속은 어디다가 두고 자식 데리고 자네를 그리워하며 살려고 하겠는가.”

조사 결과 고인은 키 180센티미터에 건장한 체격의 고성 이씨 가문의 둘째아들 이응태로, 조선시대인 1586년 서른한 살에 전염병으로 작고한 것으로 추정됐다. 그의 아내가 바로 남편의 저고리와 함께 자신의 치마, 아이의 저고리, 애틋한 사연이 적힌 한지 속의 미투리를 함께 넣어 저승길까지 동행하고픈 애틋한 사랑을 전한 것이다.

 

고전문학을 대중문화와 콘텐츠화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접목하는 데 집중해온 이영숙 박사가 저술한 신간 ‘사랑에 밑줄친 한국사’는 조선시대 이응태 부부의 애틋한 이야기처럼 삼국시대부터 일제 식민지 시대까지 시와 노래로 남은 연애사건 28가지를 ‘발굴’해 당시의 시대와 문화와 함께 직조했다.

이영숙/뿌리와이파리/1만8000원

2001년 12월, 일본의 아키히토(明仁) 덴노는 68세 생일기념 기자회견에서 제49대 고닌(光仁) 덴노의 왕비이자 제50대 간무(桓武) 덴노의 생모인 고야신립(高野新笠)에 대해 의미심장한 언급을 했다.

“나는 간무 덴노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낍니다.”

이야기인즉슨, 제48대 덴노가 후계자 없이 죽으면서 백제 무령왕 후손의 도래인 야마토가 출신의 고야신립과 결혼했던 62세의 고닌이 뒤를 잇게 됐다. 고닌은 덴노에 오르면서 곧바로 고야신립의 아들 야마노베(山部)에게 승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백제 무령왕의 10세손 야마노베는 781년 제50대 간무 덴노로 즉위한 뒤 794년 나라에서 교토로 수도를 옮긴 후 찬란한 ‘헤이안(平安)시대’를 열었다. 고야신립은 이후 황태부인으로 추존되고, 사후에는 교토의 히라노(平野)신사에 최고의 지위로 모셔진다.

저자는 이에 대해 고닌이 덴노에 오르는 과정에서 백제계의 지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백제와 일본에 형성된 혈연적 연계는 고대국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이었던 부족 간의 혼인, 가문끼리의 정략결혼 또는 사랑이 국제적으로 이뤄진 사례”라고 평했다.

책은 이외에도 다양한 빛깔의 연애와 사랑 이야기를 보여준다. 최고의 정승으로 평가받는 황희의 간통 스캔들과 천재학자 율곡의 플라토닉 러브 등 역사적 위인이 아닌 로맨스의 주인공을 만나기도 한다. 유학자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채운 부부의 세계, 서릿발 같은 정치가가 아닌 사랑의 포로가 되어 쓴 정철의 연애시 등도 실록의 간극을 풍성하게 채워준다.

‘사랑에 밑줄친 한국사’가 한국 역사 속 연애를 다룬 미시사라면, 정창권 고려대 교수가 펴낸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은 조선시대 남성들이 살림하는 모습을 담은 미시사라 하겠다. 정 교수는 책에서 조선시대가 남존여비의 가부장제 사회였다는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조선의 많은 남성들이 집안의 살림꾼이었다며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한다.

정창권/돌베개/1만5000원

대표적인 남성 살림꾼으로 제시된 이는 대유학자 이황. 그는 21세 때 김해 허씨와 결혼했다가 허씨가 두 아들을 낳고 산후병으로 사망하자 30세에 다시 지적장애인인 안동 권씨와 재혼했다. 그는 장애를 가진 아내를 대신해 농사와 반찬거리 마련, 노비 관리, 재산 증식 등 바깥 살림은 물론 음식과 의복 같은 안살림도 주관했다. 심지어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큰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집안 살림에도 참여해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선비란 모름지기 용모는 소탈하고 우아하며 고요하고 담백해서 욕심을 적게 가지도록 한 뒤에 생업을 도모한다면 어떤 해로움도 없을 것이다.”

저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전인 16세기까지만 해도 여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남녀공존의 시대였으며, 여성은 주로 집안에서 음식과 음복을 담당한 반면 남성은 다양한 생계활동을 비롯해 의식주 마련, 재산 증식, 노비 관리, 접빈객 등을 담당했다고 분석한다. 많은 남성들이 녹봉을 받는 관리로 나아가려 했고, 관리가 되지 못하면 농사를 지었으며, 심지어 닭을 기르고 벌을 기르기도 했다. ‘쇄미록’을 쓴 오희문은 양계를 했다고 일기에 적고 있다.

“1595년 3월15일. 병아리 7마리를 길러 키워서 거의 메추라기만 하게 되었는데, 오후에 이웃집 고양이가 1마리를 물어갔으니 몹시 밉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부터 내외법(內外法)이 강조되고 여자의 사회 참여를 금기시하는 풍토가 만연했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가부장적 현상이 본격적으로 확립됐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다만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감안해 읽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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