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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42> 하동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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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1-15 22:48:14 수정 : 2013-01-15 22: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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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 정치혼란 속 문벌 형성… 본관 같으나 시조 다른 3개파 있어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조선씨족통보’에 따르면 여섯 계통으로 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하동정씨는 본관을 같이하면서 계통을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첫째 계통은 신라 말기 하동호장 정도정(鄭道正)을 시조로 하는 밀직공파(密直公派)이다. 정도정은 신라 진성왕 때 하동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후백제군이 신라를 침범할 때(923년, 경명왕 7년) 향병을 단련하여 하동성(河東城)을 지켰다. 그 뒤 고려로 통합될 때는 경순왕을 개성까지 호위하여 광평성평장사(廣評省平章事)에 올랐다. 하지만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문하시중을 지낸 정석숭(鄭碩崇)을 일세조로 삼고 있다. 

 
하동정씨 밀직공파의 시조인 정도정의 단비.
정도정의 후손들은 산원공파(散員公派)·흥의공파(興義公派)·문성공파(文成公派)를 형성하고 있다. 문성공파는 정인지의 아들 대에서 익위공파(翊衛公派)·하성위공파(河成尉公派)·장정공파(莊靖公派)·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찬성공파(贊成公派)로 나누어진다. 그 외에 정흥안(鄭興安)의 후손은 진사공파(進士公派), 정흥도(鄭興道)의 후손은 현감공파(縣監公派)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8세손 정을진(鄭乙珍)의 후손이 소윤공파(少尹公派)로, 정난연(鄭蘭衍)의 후손은 증손 정지(鄭地)와 정전의 대에 경열공파(景熱公派)와 병사공파(兵使公派)로 나누어졌고, 정국교(鄭國僑)의 후손은 진사공파(進士公派)로 분리되었다.

둘째 계통은 정응(鄭膺)을 시조로 하는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이다. 그는 고려 초에 하동지방에서 민병을 주관하던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고려 덕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도첨의좌정승(都僉議左政丞), 태자첨사(太子詹事)를 맡았다. 후손 분파로는 1세부터 6세까지는 단계로 내려오다가 증손을 파조로 하여 분파된다. 한림공파(翰林公派)·별제공파(別提公派)·주부공파(主簿公派)·현령공파(縣令公派)·의주공파(義州公派)·판관공파(判官公派)·직장공파(直長公派)·유수공파(留守公派)·장령공파(掌令公派)·사직공파(司直公派)·선무랑공파(宣務郞公派)·생원공파(生員公派)로 분파되었다. 

셋째 계통은 정손위(鄭遜位)를 시조로 하는 지예부사공파(知禮部事公派)이다. 그는 고려 숙종·예종·인종·의종·명종 등 5왕을 거치며 벼슬을 하였고 정헌대부 지예부사, 응양대장군(鷹揚大將軍), 문하시중에 오르고 하동백(河東伯)에 봉해졌다. 그 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하동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하동정씨는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로 총 312명을 배출했으며,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로는 총 4만9440가구에 15만83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밀직공파 정국룡의 묘.
하동정씨의 연혁과 인물

밀직공파는 신라말기 하동지방의 호족이었다가 고려에 귀부하여 광평성 평장사에 올랐던 정도정을 시조로 하고 있다. 정도정의 4세인 정연서(鄭延敍)는 한림학사를 지냈으며, 두 아들 중 첫째인 정국룡(鄭國龍)은 문과에 급제해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에 올랐으며, 둘째 정국교(鄭國僑)는 충렬왕 때 국자감 진사를 지냈다.

정국룡의 두 아들로는 정지연(鄭芝衍)과 정난연(鄭蘭衍)이 있다. 첫째 정지연은 중국어에 능통해 통역관으로 원나라를 왕래하였고, 충렬왕 5년에 좌상시 권수 동지밀직사사(左常侍 權授 同知密直司事)에 제수되었다. 동생 정난연은 벼슬이 좌사간을 지내고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며, 뒤에 중경좌윤에 추증되었다.

한편, 정국룡의 후손인 정성(鄭盛)은 밀직공파 일세조인 문하시중 정석숭(鄭碩崇)의 6세손인데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오르고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다. 그 후 그의 후손들이 하동정씨로부터 분관하여 정성을 시조로 하는 금성정씨가 되었다. 하지만, 많은 자손이 하동정씨로 환관(還貫) 하여 하동정씨 경열공파(景烈公派)를 이루고 있으며, 아직까지 금성정씨를 잇고 있는 것은 정충신(鄭忠信)의 고조부인 정원종(鄭元宗)의 후손들이다. 

고려말 왜구를 격파하고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운 정지 장군의 갑옷.
금성군 정성의 후손에서는 손자인 정지(鄭地) 장군이 유명하다. 정지 장군은 공민왕 때 왜구를 평정할 방책을 올려 전라도 안무사가 되었고, 우왕 3년엔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순천도 병마사가 되어 순천·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다. 또 1383년엔 남해에 침투한 왜구를 대파하고 지문하부사로서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가 되었고, 우왕 10년엔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었다.

1388년엔 요동정벌이 추진되자 도원수로 출전했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동조하였다. 그 후 또다시 왜구가 창궐하자 남원 등지에서 이를 대파하는 공을 세웠으나 우왕 복위사건 등 두 번에 걸친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투옥되기도 했다. 후에 위화도 회군의 공이 인정되어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로 부름을 받았으나, 병사하였다. 그의 시호는 경렬(景烈)이며, 그래서 그 후손들이 하동정씨 경열공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 밀직공파에서는 학역재(學易齋) 정인지(鄭麟趾)가 유명하다. 그는 정국룡의 손자인 정흥인의 아들이다. 태종 때 식년문과와 문과중시에 각각 장원급제한 후 예조와 병조좌랑을 거쳐 집현전 학사와 직제학을 지냈다. 이어 형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에 올라 ‘사륜요집(絲綸要集)’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저술했으며, 계유정난 때 공을 세워 우의정에 오르고 정난일등공신으로 하동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후 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에 올랐으나, 불교서적 간행에 반대하다가 고신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 예종 때에는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렸으며, 성종에 이르러서는 서정(庶政)을 총괄하였다. 그는 조선의 대표적 학자로서 김종서 등과 함께 ‘고려사’를 편찬하고 성삼문·신숙주와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다. 

조선의 대표적 학자로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운 정인지의 묘와 문성전(충북 괴산).
정인지의 큰아들 정현조(鄭顯組)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와 혼인하고 하성군에 봉해졌다. 예종과 성종 때 잇따라 공신에 올랐으나,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황해도 안악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둘째 아들 정숭조(鄭崇組)는 공조·이조참판을 거쳐 성종 때에는 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지의금부사와 도총관을 지낸 후 하남부원군에 봉해졌다. 하지만,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파직되었다.

정여창(鄭汝昌)은 정육을(鄭六乙)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역임했으나, 노모 봉양을 위해 안음현감(安陰縣監)을 지원하여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무오사화로 함길도 종성에 유배되어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되었다. 그는 정몽주·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도통을 이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사후에 동국십팔현과 동방오현 등으로 천거되기도 했다. 나주의 경현서원, 상주의 도남서원, 거창의 도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그 외 정운(鄭運)은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녹도만호로 이순신 휘하에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부산포해전에서 선봉이 되어 적을 추격하다 적탄을 맞아 전사했다. 정득렬(鄭得悅)은 정숭조의 증손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사천현감에 부임하자마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진주판관 김시민 등과 합세하여 싸웠다.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자, 성 밖에서 분전하였으나 전사하였다.

정상기(鄭尙驥)는 정인지의 후손이다. 그는 지도 제작에 뛰어나 백리척(百里尺)을 사용하여 대축척지도를 제작하였다. 그가 영조 때 제작한 동국지도는 우리나라 최초로 축척이 표시된 지도이다. 정상기의 둘째 아들 정항령(鄭恒齡)도 지리학 연구에 몰두하여 동국대지도를 제작하였다.

좌정승공파는 고려 고종 때 금자광록대부 도첨의 좌정승 검교 태자첨사를 지낸 정응을 시조로 하고 있다.

정초(鄭招)는 정희(鄭熙)의 아들로 정몽주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태종 때 식년문과와 문과중시에 급제하였다. 세종 때 공조·예조참의를 거쳐 함길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왕명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하고 예문관 대제학으로 정인지와 함께 역법을 개정하고 ‘삼강행실도발(三綱行實圖跋)’을 편찬했다. 

좌정승공파 정수충의 묘와 영정(작은 사진).
정수충(鄭守忠)은 정제(鄭提)의 아들이다. 그는 세종 32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사예를 거쳐, 세조 등극을 도와 좌익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이후 집현전 직제학으로써 하원군에 봉해지고, 첨지중추원사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 일대 10리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했으며, 대구 청백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는 슬하에 9형제를 두었다. 종4품 이상의 대부가 5명이나 되고, 종6품 이상의 참상이 2명, 종7품 이하 참하가 2명이었다.

정기남(鄭奇男)은 광해군 때 강홍립이 요동으로 출정할 때 김응하 장군의 좌위장으로 출전하였다. 선봉에서 싸우다 잡혀 항복을 권유받았으나 항거하여 살해되었다. 사후 숙종 때 병조참판의 벼슬이 내려졌고, 정조 때에는 선천의 의렬사에 추배되었다.

지예부사공파는 고려 중기 5왕에 걸쳐 벼슬을 지내고 정헌대부 지예부사 문하시중을 역임한 하동백 정손위를 시조로 삼고 있다.

정손위의 아들 정세유(鄭世裕)는 명종 때 서북면 병마사를 지냈다. 서북면 병마사를 지낼 때 백성을 수탈한 공물을 왕에게 바쳐 환심을 사고 아들 정윤당(鄭允當)을 이부원외랑에 앉혔다. 이에 참지정사 상장군 문장필(文章弼) 등이 탄핵으로 하여 남쪽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복직되었으나, 아들인 정윤당·정숙첨(鄭淑瞻)과 모반을 꾸몄다는 밀고를 받아 다시 유배되었다.

정세유의 아들 정숙첨은 희종 때 참지정사를 지냈다. 군권을 장악한 최충헌에게 끊임없이 불평하였으며, 끝내 최충헌 모살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에 처할 위기에 몰렸다. 그때 그의 사위이자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의 도움으로 하동에 유배되었다가 복권되어 평장사에 올랐다.

정안(鄭安)은 정숙첨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참지정사에 올랐다. 최우의 전권이 심해지자 남해로 은퇴하였으며, 사재를 희사하여 대장경 일부를 맡아 간행하였다. 그 후 최우의 아들 최항이 전권을 쥐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비방하다 백령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다.

정봉수(鄭鳳壽)·기수(麒壽) 형제는 충무위 부사과 정양년(鄭陽年)의 아들이다. 봉수는 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 4000여 명을 모아 용골산성을 지켰다. 후금의 병사 반수 이상을 참수하고, 포로가 된 백성을 구출하였다. 그 공으로 철산부사·용천부사에 올랐으며 경상도 전라도 병마절도사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동생 기수는 용골산성을 지킨 공으로 사도시 판관이 되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순찰사 홍명구의 협수장이 되어 자모산성에서 활동하였다. 죽은 뒤 두 형제는 철산의 충무사에 제향되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하동정씨 현대인물

하동정씨의 현대인물로는 정주영(鄭周永·1915∼2001)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현대그룹의 창업자이며 자수성가한 기업인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제3공화국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에 편승하여 건설사업을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으나 낙선하였고, 후에 대북사업에 집중하여 금강산 관광 사업을 이뤄내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로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 겸 국회의원 등이 있다.

하동정씨 현대인물에는 정주영 일가 외에도 정문순(주일총영사), 정비석(소설가), 정진기(전 매일경제신문사장), 정병조(성균관대 교수) 등이 있다. 국회의원으로 정남·정현경·정병학·정해준 등이 있고 관계에서는 정재설 전 농림부 장관 등이 있다.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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